다시쓰는 창세기_18
리브가는 사라의 장막으로 들어올 때, 두 개의 시간을 한꺼번에 마주했다. 하나는 사라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시작된 자신의 삶이었다. 장막 안에는 아직도 사라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유칼립투스 향과 짙은 머릿기름 냄새가 섞인 냄새. 그건 리브가가 알던 어느 향과도 달랐다.
그는 장막 한가운데 선 채, 긴 숨을 들이마셨다. 시어머니가 남긴 침묵은 어쩌면 이삭보다 더 무거웠다.
며칠 뒤, 리브가는 처음으로 장막 안의 물건 배치를 바꾸었다.
가죽 덮개가 늘어져 있던 벽 쪽에 직접 짠 천을 걸었다. 사라가 쓰던 낮은 찬장은 치우고, 그 자리에 먼 길에서 가져온 조개껍질 그릇을 올려두었다. 식물도 바꾸었다. 사라가 기르던 묵직한 다육 대신, 리브가는 허브를 심었다. 타지에서 가져온 작은 자스민 한 송이도 조심스레 화분에 꽂았다.
하인들이 수군거렸다.
“사라 부인께선 절대 건드리지 않으셨던 자리인데…”
“이삭 주인께서 허락하셨을까…”
그 말에 리브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하인들을 향해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장막은 내 공간이에요. 앞으로는 내 방식대로 정리할 겁니다. 필요한 건 말할 테니, 수군거리는 대신 손을 움직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하인 중 누구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복종으로 바뀌었다.
그날 저녁, 이삭은 장막으로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벽에 걸린 천을 오래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꿨어?”
리브가는 대답 대신, 자스민이 든 화분을 천천히 돌려 햇빛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 작은 동작이 ‘응, 내가’라는 말을 대신했다.
“좋네.”
이삭은 그 말을 남기고, 낮에 흘린 먼지를 조용히 털어냈다. 칭찬인지, 평가인지 모를 말투. 하지만 리브가는 그 한 마디가 “허락은 필요 없다”는 뜻이란 걸 이해했다.
며칠 뒤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늦은 오후, 장막 뒤편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인이 말을 매던 끈을 헐겁게 묶은 탓에 말이 뒷다리를 다쳤다.
리브가는 바로 그 자리로 달려갔다. 상처 부위를 살피고, 재갈과 고삐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이삭이 다가오려 하자, 그는 손으로 막아섰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는 다친 말에게 물을 먹이고, 하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물도 식구예요. 장막의 일은 꼼꼼해야 해요. 작은 실수가 사람도, 짐승도 다치게 합니다. 다음 실수 땐, 이 장막 안에서 나갈 각오 하세요.”
이삭이 조용히 리브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놀람도, 간섭도 없었다. 다만 아주 잠깐, 입꼬리가 움직였다. 묵직한 칭찬이었다.
그날 밤, 모래 바람이 유난히 거셌다. 장막은 삐걱거렸고, 리브가는 천을 단단히 동여매러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을 땐 손등에 모래 긁힌 자국이 생겼다.
“손 좀 이리 내봐.”
이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리브가는 놀라서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주었다. 그의 손은 거칠었고, 따뜻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사라의 빈자리에 넣고 싶어하는 거 같아.”
“그건…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죠.”
이삭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 있었지. 아주 오래.”
리브가는 그때 알았다. 이삭은 고집이 센 게 아니었다. 허물지 않는 대신, 비워두는 사람이었다. 사라가 남긴 그 자리를 가만히 열어둔 채, 누구도 들이지 않고 스스로도 앉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 빈자리에 자신이 앉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장막의 향이 바뀌었다. 유칼립투스 대신 자스민의 향이 퍼졌다. 그리고 그 향기를 맡은 이삭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곳은 더 이상 사라의 장막이 아니었다.
리브가의 장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