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덕분에 우리는 덜 고통스럽게 배운다
구약성서 에스더서 초반에 모르드개 소개가 있다.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베냐민부터 시작하는 거 보면 모르드개는 분명 유대 민족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페르시아식이다, 더욱이 페르시아 신 무로닷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대민족은 본인 정체성이 세상 중요하다. 페르시아는 유대 기준으로 매우 이방인이다. 이건 마치 목사님 아들 이름이 관세음보살인 거랑 비슷하다.
모르드개는 공무원이다. 공항입국심사원이라고나 할까. 페르시아에서의 삶이 괜찮았던 거 같다. 모르드개 가족이 유다로 돌아갈 기회가 2번 있었는데 가지 않아서다. 그는 페르시아를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는 페르시아인처럼 사는 게 편했다.
그러던 모르드개에게 위기가 닥친다.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이유로 하만이 제대로 빡이 친 거다. 그럼 하만은 누군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하만에게 무릎 꿇게 하니”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혹자는 신앙 때문이라는데 이름까지 페르시아식으로 바꾸는 판에 보이지 않는 신앙까지 지켰을까.
아각은 아말렉 쪽이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은 세상 웬수지간이다. 신앙보다 민족 악감정이 크다라는 게 더 맞겠다. 하만의 반응을 보면 더 확실하다.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어느 정신 나간 놈이 개인 한 명 싫다고 그 민족 전체를 죽인다고 날뛰겠나. 아말렉과 유다의 오랜 감정의 골이 그 정신 나간 짓을 만들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
이건 유대인의 전형적인 기도와 회개의 표현이다. 집에서 기도해도 될 일인데 굳이 성중에 나가서 한다. 페르시아인으로 살고 싶던 그가 위기 상황에서 본인 정체성을 드러낸 순간이다.
모르드개는 이중생활을 했다. 다수 문화에 섞이기 위해, 차별받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숨긴다. 그런데 하만은 모르드개가 아무리 페르시아식으로 살아도 그를 유대인으로 봤다. 동화의 노력은 종종 일방적이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생긴다. 모르드개가 페르시아인처럼 살려고 애쓸수록, 그는 진짜 페르시아인이 가진 것을 잃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숨기며 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았다.
반면 모르드개는 페르시아식 이름을 갖고도, 공무원이 되어도,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며 살아야 했다.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유대인처럼 행동하지 않으려고. 그는 모델을 따라 하느라 자신만의 경쟁력을 버렸다.
모르드개가 성중에 나가 통곡한 순간, 그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해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쓴 모습은 페르시아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인 모르드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이야기는 반전된다. 에스더서의 남은 이야기는 모르드개가 어떻게 유대인으로서, 자기 정체성 그대로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페르시아인처럼 살 때가 아니라, 유대인으로 당당히 섰을 때 진짜 힘을 발휘했다.
좋아 보이는 걸 따라 하기보다 내 모습대로 사는 게 내 경쟁력이다. 모르드개는 그것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배웠고, 우리는 그의 이야기로부터 조금 덜 아프게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