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
이제 본격적으로 현대문명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사고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은 과학혁명, 계몽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있다. 그동안 이 사고방식에 관해선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서, 수많은 학자가 각 사고방식의 역사나 개념을 꽤나 상세히 분석하고 종합하였다. 여기선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 사고방식을 관통하는 핵심을 파고들고자 한다. 즉 이것에 어떤 신념이 자리 잡았는지 알아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애초 무한한 진보나 풍요로운 세상과 같은 이전에 없던 낙관론이 가능한 이유도 모두 사고방식에 내재한 신념 덕분이다. 때문에 우리는 신념을 배태한 과학혁명으로 먼저 향할 수밖에 없다.
일리야 프리고진은 과학이 어떤 근본적인 호기심을 다른 분야와 공유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기술 이외에도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 추구하는 많은 신념과 신화를 발견하게 된다. 신화와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노력은 이 세계의 본성과 이 세계가 조직된 방법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것이다.”(3) 다만 과학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 내기 위해선 정교한 관찰 수단과 아울러 이를 합리적으로 분석할 방법이 필요했기에, 이를 갖지 못한 과학은 근대 이전까지 신화나 종교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천동설인데, 기독교의 공인 아래 천 년을 넘어 서구 유럽의 정신을 지배했다. 이것의 핵심은 사람과 지구를 태양계와 우주의 중심으로 위치시켰다는 데 있다. 이것은 실상 과학을 가장한 종교 설화에 불과했다. 기독교 교리를 뒷받침하는 이 불충분한 과학 때문에 유럽 사람들은 신의 말씀을 오래도록 믿고 따랐다. 그러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했다.
지동설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기독교 체제에서 권세를 누렸던 교단 고위층은 천동설을 수호하려 했으며, 혹여 자신의 믿음이나 권력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불안해하였다. 실제로 관찰적 증거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자 지동설은 교단으로부터 탄압받았다. 종교 재판은 갈릴레이의 입을 틀어막았고, 브루노의 목숨을 앗아 갔다. 또 믿음 가득한 대다수 신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거나, 탄압을 애써 무시했을 것이다. 반면 자연철학자라 불렸던 지식인은 오히려 과학을 통해 신적인 권능을 증명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신이 만든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혀낼 방법으로 과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과학은 신을 돋보이게 만들긴커녕 체제의 주류에서 퇴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몇 세기가 지나 과학혁명이 끝나 갈 즈음 이들은 자연철학자가 아닌 과학자로서 정체성을 굳건히 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파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튀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쳐 뉴턴까지 이어졌다는 건 잘 알려졌다. 갈릴레이는 지구 바깥을 관찰하며 지동설을 지지하였고, 브라헤는 당시로선 가장 정교한 화성 관찰 기록을 남겼으며, 케플러는 브라헤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태양계 운동을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은, 태양계 운동의 기본적인 원리인 운동 법칙과 중력 이론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지동설은 역사의 뒤편으로 천동설을 밀어내고 태양계 운행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써 확고히 자리 잡았다. 물론 이것은 과학혁명 동안 있었던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애 해당한다. 많은 과학자가 각 분야의 활동 영역에서 과학혁명에 동참했고, 이로써 과학은 종교를 밀어내고 체제의 권좌 중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과학혁명이 사람들에게 끼쳤던 더 중요한 영향은 특정한 과학자가 발견한 법칙보다 그들이 관찰과 탐구를 수행하며 가졌던 특유한 발상일 것이다. 이 발상은 흔히 ‘뉴턴적 종합’ 혹은 ‘기계적 결정론’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하여 프리고진이 한 말을 들어보자. “궤적들의 기본적 특성들은 준법성, 결정론, 그리고 가역성 등이다. 우리는 궤적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운동법칙에 관한 우리의 지식 이외에도 계의 한 순간에 관한 경험적인 정의가 필요함을 보아왔다. 그러면 일반적인 법칙은 논리가 기본적 가설로부터 결론을 추론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초기상태」로부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계가 겪어가는 일련의 상태들을 추론하게 된다. 놀라운 양상은 일단 힘들이 알려지면 어떠한 하나의 상태도 계의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까지도 포함하여 그 계를 완전히 정의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 순간 모든 것이 주어진다. (…)”(4)
뉴턴은 신이 완전한 세상을 창조한 후 사라졌다고 믿었다. 즉 이 세상에선 어떤 것도 감가상각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시간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5) 따라서 이곳에선 운동에 관한 모든 추론이 가능하지만, 추론이 거듭될수록 역으로 자유의지는 불가능해진다. 즉 우리를 포함한 모든 대상은 계산된 결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뉴턴 물리학이 그동안 짐작도 못했던 현실을 증명해 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운동 법칙과 더불어 기계적 결정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중 라플라스처럼 기계적 결정론을 전파하는 데 매진한 과학자도 있었다. 라플라스는 이 결정론을 극한으로 밀어붙였고, 마침내 환원주의에 도착했다.
라플라스는 기계적 결정론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악마를 소환했다. 이 악마는 현실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알고 있는데, 어떤 사건도 이 악마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다. 만약 악마에게 특정 시점에 위치와 속도만 주어진다면, 이 악마는 미래뿐 아니라 과거도 알아낸다. 이 악마가 무서운 건, 운동은 물론 사람과 관련한 모든 걸 ‘계산’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라플라스는 인류가 악마와 같은 지능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은 듯하다.(6) 이런 그의 믿음이 가능한가 따지기 전에, 유럽 사람들에게 고전 물리학이 지녔던 위상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기계적 결정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하도록 몰아갔다. 이것에 의하면 사람은 기계이고, 자유의지는 환상이다.(7) 아마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환원주의는 사람이 왜 기계인지 주장하는 편에 서 있다.
한 때 고전 물리학은 수많은 과학자에게 지지받았고, 이런 영향력은 열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이 주요 이론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환원주의도 여러 과학자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현실을 완벽하게 계산할 도구를 손에 쥐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고전 물리학적 가정이나 근거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 반박당하고 말았다. 열역학은 시간을 역행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설명했고, 상대성 이론은 뉴턴에겐 수수께끼로 남았던 중력의 작용 방식을 설명했으며, 양자역학은 초기상태를 확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한 마디로, 고전 물리학이 생각했던 도구란 허상이었다. 이처럼 고전 물리학은 현대 물리학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과학자에게 이론으로써 가치가 퇴색했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몇몇 과학자 마음에 환원주의가 살아 숨 쉰다.
3. 일리야 프리고진·이사벨 스텐저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신국조 옮김, 자유아카데미, 2011, 78-79쪽.
4. 일리야 프리고진·이사벨 스텐저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신국조 옮김, 자유아카데미, 2011, 106-107쪽.
5. 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소나무, 1995, 25-26쪽. “(…) 뉴턴의 신은 이 세계를 너무나 완전히 만들어 놓고 보니 신 자신이 이 세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은 이 세계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세계는 감가상각조차 되지 않는 완전한 세계였다. 감가상각되지 않는다는 뜻은 시간의 가역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시간이나 현재의 시간,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서로 교환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등질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시간의 등질성은 시간의 절대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등질적 시간의 세계 속에서는 자유의지가 일체 허용될 수 없으며, 이 세계는 단지 기계적으로 운동할 뿐이다. (…)”
6. 스튜어트 카우프만, 《다시 만들어진 신》,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41쪽. “(…) 라플라스는 헤아릴 수 없이 막강한 지능을 가진 ‘악마’를 상상했다. 자, 어떤 시점에 우주 속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 정보가 주어진다면, 라플라스의 악마는 그 입자들의 향후 운동 궤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뉴턴의 법칙들이 시간 가역적이기 때문에, 입자들의 과거 운동 궤적도 전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지능이 충분하고 모든 입자들의 현재 위치와 속도 정보가 정확하게 진술된다면, 인간 자신은 물론이고 가령 인간의 문화까지도 모두 포함한 전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이다. (…)”
7. 스튜어트 카우프만, 《다시 만들어진 신》,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42쪽. “결정론은 인간의 행위 주체성에서도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지금도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결정론적 시각에 따르면 인간은 기계이다. 자유 의지는 환상이다. (…)”
8. 스튜어트 카우프만, 《다시 만들어진 신》,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