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신념
환원주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우리가 잘 아는 저명한 과학자조차 현실은 결국 하나의 원리로 설명될 거라 굳게 믿는다. 이에 대해선 카우프만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머리 겔만, 스티븐 와인버그, 데이비드 조너선 그로스 같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환원주의자이다. 그들의 견해는 우주는 ‘그저 무엇무엇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견해가 아니다. 이런 물리학자들은 환원주의만이 물리학에 대한 합리적 접근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실로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난 몇백 년의 성공이 그들의 주장을 지지한다.”(8) 현대 물리학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정립했음에도, 몇몇 과학자에게 자리 잡은, 환원주의라는 지적 낙관론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고전 물리학이 거둔 엄청난 성공에 따른 영향력이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과학기술의 성공을 목도한 일반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과학적 성취 보단 생활양식의 향상에 주목하였고, 발전하는 지식이 내 삶을 개선시킬 거란 기대를 품게 되었다. 헌데 기계적 결정론엔 내 삶을 선택할 자유를 부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즉 지식을 향한 발걸음은 기꺼이 동조하면서도, 기계적 결정론이 부정했던 자유의지는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라는 신념이 탄생하였다. 아마 대다수 일반인은 자유 없는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이 신념에 대해 우리에겐 생소한 영지주의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모두 잊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영지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다. 이들은 과학적 물질주의로 인간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거부하지만,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과학이 어찌어찌 인간의 정신을 그 정신의 조건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적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리라고 믿는다. 지식의 힘으로 인간이 (다른 생명체는 가질 수 없는) 자유를 갖게 되리라는 영지주의적 믿음은 세계 곳곳에, 특히 서구 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다.”(9)
이제 완전한 지식에 의한 자유는 현대사회의 교리로 자리매김했다. 과학기술이 약속하는 눈부신 미래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을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계속되는 발전으로 신념에 양분을 불어넣고, 사람들은 이 양분을 받아 신념을 향한 신앙심을 강화한다. 이에 관한 예로 ‘기술적 특이점’이 있다. 여러 과학자와 기업인이 지지하는 이 발상은,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특정한 시기에 도달하면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것을 가장 분명히 밝힌 사람 중 한 명인 레이 커즈와일은,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말을 그의 책에 써놨다.
“특이점은 생물학적 사고 및 존재와 기술이 융합해 이룬 절정으로서, 여전히 인간적이지만 생물학적 근원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또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에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인간성이란 게 있을까? 물론이다. 늘 현재의 한계를 넘어 물질적, 정신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유의 속성은 여전할 것이다.”(10)
그는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면 기계와 사람이 하나 될 것이라 말하면서도, 사람을 이루는 고유한 속성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모순적인 말은, 완전한 지식은 원하지만 내 삶의 주도권은 내려놓고 싶지 않은 여느 사람들의 심정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허나 특이점을 넘어선 세상에서, 과연 ‘인간의 고유의 속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가 되면 사람과 기계의 구분도 사라질 텐데 말이다. 어쨌든 그에 의하면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들을 계속해서 자유롭게 하는 중이며, 그날이 오면 사람들은 전에 없던 자유를 맞볼 것이다.
8. 스튜어트 카우프만, 《다시 만들어진 신》,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45쪽.
9. 존 그레이, 《꼭두각시의 영혼》, 김승진 옮김, 이후, 2016, 19-20쪽.
10.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김명남·장시형 옮김, 김영사, 2007, 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