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보트 트레바리 후기
그린보트에서 트레바리 독서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아 얼른 신청했다. 선정된 책은 <좋은 삶을 위한 기술>이었는데, 처음 책을 받아봤을 때는 의아함이 들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감정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특히, 초반부에 이효리가 "아무나 돼"고 말했던 맥락을 비판하는 부분에서부터 사실 그런 컨텍스트가 아니었을텐데, 라는 생각에 불편함이 생긴 상태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철학적 사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 하면서, 책을 읽으며 공감이 되는 내용과 공감되지 않는 내용을 카테고리별로 나눠 정리하며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이번 독서모임은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참여했는데, 대표님과 유지원님이 발제자로 함께 진행하시는 것을 알게 되고 놀라기도 하고 좋은 기회에 참석할 수 있어 기뻤다. 특히 발제자로서 이 책을 선정한 이유와 함께, 생각해볼 점들을 짚어주신 점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 속에서 드러나는 모순된 내용들,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다가 뒤에서는 저렇게 말하는 부분들을 통해 삶의 다면성을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트로를 던져주신 덕분에 책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다들 말씀을 잘하시는데, 나는 생각 정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 다른분들처럼 조리 있게 잘나오지 않아서 어려웠지만 그래도 간만에 머리 굴리면서 이야기 하려고 생각한 시간이 많이 도움이 됐다.
미리 주신 생각해볼 거리와 함께 참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해본 결과, 좋은 삶의 기준이 ‘내가 중심이 될 때’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은 삶 = 사회가 정한 프레임(성공, 명예 등)에 맞추어 기준을 세울 경우, 그것이 행복과 일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이 ‘좋은 삶’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볼 거리 중) 여러분의 ‘좋은 당장’과 ‘좋은 영원’은 무엇인가요?
- 좋은 당장: 걱정이 없는 편안한 순간. 앞에 있을 회의에 대한 걱정도 잠시 잊는 순간. 찰나의 순간이어도 괜찮다.
- 좋은 영원: 죽기 전에 “좋은 삶이었다” 하고, 마치 필름처럼 좋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떠날 수 있는 일.
여기서 ‘좋은 당장’은 내 눈앞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작은 성취들(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 보내기)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작은 순간들을 통해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좋은 영원’은 장기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과 가치에 가까운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내 삶의 중심을 세우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이정표와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GPT에게 이 내용을 물어보니, ‘좋은 당장’과 ‘좋은 영원’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당장’의 작은 선택들이 ‘영원’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고, ‘영원’이 내가 매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준다고 한다. (꽤 괜찮은 답변 아닌가!)
행복감은 그렇게 잠깐 들이마시는 신선한 공기지, 일상사가 된다거나 자주, 그리고 길게 가질 것이 아니다.외식을 '집밥'으로 삼을 수 없는 노릇과 같은 이치다.그러므로 행복은 우리가 쫓아가 꼭 붙잡아야 할 삶의 목적이 아니라 '좋은 삶'을 살 때 부수적으로 생기는,좋은 행위'가 수반하는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대표님께서 말씀해주시면 행복의 4가지 종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기준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가? 스스로 생각해보니, 나는 꽤 오락가락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평소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 말을 잘하지도, 특별히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열심히 살아오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꽤 많이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었고, 대단한 사람은 아직 되지 못했지만 최소한 내 영역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족한 언어와 목소리로, 그래도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가 스스로를 루저라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런 활동들을 많이 해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도파민 중독처럼 감각에 의존한 행복을 추구하거나, 소명의식 따위 필요없다는 극단적 생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나의 이런 모습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감각에 기댄 행복이 악순환을 부른다고 했는데, 결국은 조화가 가장 중요한게 아닌가 싶다.
각각의 행복은 충돌하거나 상호 보완적일 수 있으며, 삶에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1. 즐거움과 쾌락
- 순간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행복.예: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기분 좋은 일을 경험하는 것
-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거나 질릴 수 있으며, 없어지면 불행을 느낄 가능성이 큼
2. 만족감
- 삶 전반에 대한 만족에서 오는 행복 ex: 러닝을 통해 얻는 성취, 독서모임을 통해 얻는 성취 등
- 순간적인 즐거움보다는 삶 전체의 의미에서 오는 안정감.
3. 평온함
- 감정의 극단을 피하며 고요함을 유지하는 행복.예: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상태.
- 기쁨과 슬픔을 초월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상태.
4. 덕과 이타적 가치
- 세상과 공동체에 기여하며 느끼는 행복.예: 타인에게 선한 영향을 주거나 연대감을 느끼는 것.
- 개인적인 행복을 넘어선 도덕적, 이타적 행동에서 오는 깊은 만족감.
말씀주시길 지원님은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난 분이라는 이야기를 주셨는데, 나는 여기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이유로 오늘은 치킨을 먹고, 내일은 운동을 할 거야"라든가, "나는 평생 치킨을 먹으면서 다이어트는 좀 포기할 거야"처럼 결정을 명확히 내리고, 그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 않는 능력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만의 행복을 조율하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볼 내용 중) 여러분들에게 각각 놀이란, 노동이란, 그리고 소명이란 무엇인가요?
- 놀이: 다음을 살아가게 하는 연료. 과정이 힘들어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짧은 순간이라면 그걸로 족하다.
- 노동: 나의 인간으로서 가치를 더해주는 것. 인정욕구를 채워주는 일들.
- 소명: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도 나아질 수 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수 있다는 희망 전파하기
놀이, 노동, 소명은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노동 속에서 즐거움(놀이의 요소)을 찾는 것, 소명은 삶의 목적이 되는 고차원적인 것이라 이 안에서 노동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오늘 이야기에서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을 나누는 기준은 ‘전선’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선은 삶에서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중요한 영역이나 우선순위를 의미한다. 즉 “내가 지금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가?” 또는 “내 삶의 주요 관심사와 에너지를 쏟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은지, 반대로 심플한가? 에 대한 기준이다.
나의 경우는 미니멀을 지향하지만, 결국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30대의 마지막에 접어들면서 예전보다는 좀 더 심플해졌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최대한 많이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며 장인 수준으로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상위 20%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경험과 시도를 잘 조합하면 나만의 유니크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 만큼은 최소한의 기준으로 꼭 필요할 것 같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점은, 맥시멀리스트를 추구하더라도 그 안의 세부적인 것은 미니멀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선택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는 집중을 지속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 볼 거리들에 답해본 내용이 앞으로 나의 방향성 일 것 같다. 나로써 홀로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본다.
그러므로 '나'를 없애려하기보다 더 나은 나'로 만드는 것이 좋은 삶을 사는 데 나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열린 유일한 대안이다.
(생각해 볼 것) “세계는 왜 이렇게 모든 존재를 납작한 것으로 관계시킬까. (...) 세상이 규정하는 나이에, 직업에, 젠더에 일치하는 언행을 하느라 우리 모두 그리 가난한 존재가 되었구나.”
세상이 납작하지 않다면, 또는 납작한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삶에서 어떤 부분을 바꾸고 싶나요?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용기를 내고 싶다. 사람들은 나의 인상과 평소 태도를 보고 성실하고 모범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misfit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사회의 프레임에 나를 맞추며 살아왔는데, 항상 괴로웠다.
예를 들어, 왜 사무실에 앉아서 8시간을 채워야만 일이 되는 걸까? 누워서 글을 쓰면 안 되는 걸까? 아침에 충분히 자고, 오후에 맑은 정신으로 햇살을 받으며 일하면 안 될까? 벚꽃 아래에서 일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기존의 프레임을 깨고, 내가 잘하는 것을 그 환경에서 더 발휘하고 싶다.
(생각해볼 것) 내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내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단호하게 바꿔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부유하지 못한 가정환경이라던가 부족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 등 애초에 태어남으로써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모든 자조건을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출발선이 다르고, 모두가 같은 삶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내 삶을 만들어가는 데 처음부터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절대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안된다.
내가 단호히 바꿔야 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좋아해주는 일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그동안 열심히 잘 살아오며 쌓아온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분명히 있다.
채찍질은 어쩌면 비난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를 더 좋아해주는 언행을 자주 하며, 나 자신을 응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