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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부피감인가, 편안함인가

양귀자의 소설 <모순>

by 낮잠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스물다섯 살 안진진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조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풍요과 빈곤 등.. 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 부모, 가족, 나 자신까지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라.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나는 항상 이벤트가 꽉꽉 채워져 있고 비어있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단조롭지 못한 살았다. 덕분에 심심할 틈은 거의 없었지만, 항상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은 원래 그렇게 채워나가야만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고 느꼈었는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오랜 시간 누적이 되다 보니 드디어 나에게도 무리가 되는 시점이 왔다.


그것을 계기로 요즘은 좀 더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돌아와, 퇴근하면 내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운동을 할 때도 있고, 약속에 갈 때도 있고, 예전이면 매주 들었을 북토크나 강의를 이제는 한 두 달에 한번씩 들으러 간다.


그것도 귀찮은 날은 집에 누워서 그냥 쉬기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렇게 살아보니 몸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한데, 자꾸만 불안하다. 인생의 부피를 늘리지 않으려다 보니 지나치게 단조로워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닌데 잠깐의 공백이 때로는 지루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부피를 늘려야 할까. 내가 원하는 삶은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모순적인 생각들이 내 머리를 지배한다.

반드시 효율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순간에 즐거운 일들을 해나가며 채워나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드시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그것으로 돈을 벌지 않더라도 우리는 악기를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을 하기도 한다


문득 “이걸 해서 뭐 하지”라는 생각이 살면서 들 때가 있다. 평생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빈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 이렇게 점점 삶의 재미를 잃어가는 게 아닐까 두렵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몸과 마음이 너무나 편안하기도 한 이 상태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공존하는 요즘은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삶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책 속의 문장들

그리고 뒤에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 도 되는 것일까.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니의 경험이 나에게서 멋진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동기 유발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치는 꼭 반이야 할 빛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된 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 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 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 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에머니와 내가 다른 집이었다. 내가 어 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 아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올 가진 사람은 없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약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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