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p, [Like a Friend]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일종의 너드들의 집합소라 해야 할까? 딱히 크게 말썽 피우는 사람 없이 그저 하라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언니가 먼저 입학을 하고, 그 후 언니를 따라 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집에 떨어져 있어 언니와 함께 어린 나이에 자취를 했었다. (10대 딸 둘끼리 자취를 시키는 나의 부모님도 상당히 용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언니가 졸업하고 떠난 후에는 나는 홀로 집에 남게 되었다. 그러다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오게 되었는데, 나중에 여러 병원을 다니며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분리불안 장애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였던 게 문제가 된 것 같다는 분석이었다. 주변에 조력자나 보호자가 있을 때는 안정적이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던 거다. 하지만 딱히 반항하는 법은 몰랐었고, 우울이 반항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나는 사람을 피했고, 밖으로 나가길 꺼렸고, 학교에 잘 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커튼을 가린 채 들어오는 햇빛을 막아 어둑한 방 한편에서 그저 웅크린 채 살아있는 걸 지겨워했더랬다. 무엇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해야 할 공부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삶 전체의 목적의 상실의 문제였다)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 외에는 해본 것도 없어서 어디 갈 줄도 몰랐다. 그저 방안에 말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런 나의 꽉 막힌 속을 조금은 해소해 주는 것만 같던 노래가 있었는데, 바로 영국 밴드 Pulp의 "Like a friend"였다.
Pulp는 90년대 후반에 영국에서 엄청나게 인기 있던 밴드로 어렴풋하게 접하기만 했다. 그들에게는 더 유명한 노래가 있었지만, 중학생 시절 보았던 영화 [위대한 유산 (The great expectations)]의 OST인 이 노래였다. 이 영화는 찰스 디킨스의 동명의 소설을 현대 버전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였다. 에단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에 시대의 명배우인 로버트 드니로까지 출연했었다. 영화 속 주인공 핀(Finn)은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의 에스텔라(Estella)를 짝사랑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그녀와의 경제적 차이와 자신의 열등감이 항상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후 그의 예술적 재능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다리처럼 작용했고, 전시회에서 그림들을 모두 팔아버리고, 자신이 이제 성공했다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이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빗길을 해쳐 뛰어가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가 생각에 잠기고 그녀에게 고백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비를 뚫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바로 "Like a friend"가 나온다.
이 노래를 들어본다면 알겠지만, 노래는 초반부는 다이내믹하지 않게 잔잔하게 독백하듯 노래가 이어진다. 그러면서 점점 감정이 쌓이다가 Pulp의 보컬 Jarvis Cocker의 거칠고 절박한 목소리를 통해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나오며 영화에서도 감정이 최고조로 치닫는다. 이 곡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장면에서 핀이 엇눌러왔던 감정, 신분의 벽, 자신의 자격지심을 모두 벗어던지는 해방감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을 거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은 꽤나 호불호가 갈리는 듯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이 영화 하나로 나 또한 해방감을 함께 느꼈다. 그런 후, 영화가 끝이 났지만 이 영화가 여전히 내 삶에 남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침대에 웅크린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내 몸과 마음의 답답함을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어딘가의 또 다른 세상의 나는 이처럼 시원하게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코비드의 위협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 후, Pulp의 재결합 소식이 전해졌다. 코비드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들이 있었던 건지, 많은 90년대-2000년 초에 활발했던 밴드들의 활동 재개 소식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중 가장 반가웠던 것이 바로 Pulp였다. 하지만 기회가 없어 그들을 보지 못해 아쉬워했었다. 그 소식이 전해졌을 때 유럽에서 지내던 시절이었지만, 보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 올해, 한국의 여름 록페스티벌 라인업에 "Pulp"가 떴다. 그렇게 내 생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여름의 페스티벌은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햇볕이 매섭다. 낮동안 너무 더워 열기에 지쳐 제대로 공연도 보지 못해 저녁쯤에는 이미 지쳐있었지만, 마지막 헤드라이너 공연인 Pulp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Like a friend는 그들의 곡에서 그다지 유명한 곡이 아니기에 최근 공연들 셋 리스트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에- 해당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자만 나의 어두웠던 시절을 채워주었던 그 소리의 주인공들을 보고 싶었다. 지친 몸으로 기다렸다 본 그들의 공연은 최고였다. 여전한 보컬로, 어쩌면 독백이라 할 듯 가사를 툭툭 내뱉으며 절제한 듯하다가 터트리는 그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되는 듯했다. 노래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했다.
이제는 달라진 내가, 더 이상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다거나 탈출하거나, 어떠한 해방감을 바라지 않는-성장한 나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Pulp-"Common People"
(Live in 2025 Pentaport Rock Festival, Incheon, Korea)
*공연에서 본 Pulp 대표곡 중 하나인, Common People
*Like a Friend는 댓글 링크를 통해 유튜브에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