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편의 글쓰기로 내가 성장한 걸까?
나도 몰랐던 깨달음
주말에 독서모임에 다녀왔다. 유료독서모임이지만, 무료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1회 차에 참여했고 2회 차는 출장과 겹쳐 참석지 못했다. 3회 차 모임이 다가오면서 뒤늦게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임 전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다. 금세 읽을 거라 생각했기에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했건만, 생각보다 책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읽는 스타일의 책이 아니었다. 에크하르트 툴레의 저서로, 의식과 에고의 역할에 대해 다루는 영성 철학자의 책이었다. 영성이란 것부터, 이제 막 종교를 조금 공부하고 있는 내게는 여전히 낯설기만 한 세계였다. 책이 마구 넘겨지는 그런 책은 아니었고- 생각하며 읽어나가야 하니 진도가 느리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공감 가는 부분들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했다. 읽은 부분까지 독후감을 작성하고는 모임을 찾아갔다.
그게 작가가 말하는 거예요. 대단하세요
책이 조금 어려웠던 건지, 지난번보다 참가자가 적어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다른 분들께 책을 완독 하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각자에 대해 소개와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미리 얘기를 나눌 질문지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중간부터의 질문에서는 내가 읽지 못했기에, 그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 생각을 말하는 거라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책을 다 못 읽어서요. 질문에 적힌 내용만을 바탕으로 한 제 생각일 뿐인데요-"라고 말이다. 그렇게 말을 끝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너무 조용했다.
두 분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게 딱 작가가 말하는 내용이에요."
"책 읽은 저희보다 나은데요."
그다음 질문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와 대단하세요."
"멋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살 수가 있구나."
나는 의아했다. 나도 모르게 살아가며, 영성 철학자라고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말하고 있는 삶의 깨달음을 내가 깨닫고 있었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었다.
새로운 아이디어, 끊임없는 확장
연구원인 나는 최근에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곤 했다. 작년에 지금의 연구실에 오게 되면서, 보스는 내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주제나 아이디어를 원했다. 보스의 한 마디로 다음날부터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해 고민하였고, 꽤나 쉽게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제시했었다. 모든 아이디어에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보스가 그저 친절하고 착한 분이겠거니 했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네요.
올해 들어와서는 아이디어가 조금 폭발적으로 떠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일종의 가벼운 경조증이 있었던 시기 같은- 그래서인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과 에너지로 가득 찼었다. 그 시기에 아주 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렸다.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살피며 발전시켜 나가며 탄탄히 준비하는 것은 AI의 활용으로 꽤나 수월했다. 물론 AI를 통한 조사 후에는 언제나 실제 발표된 논문들로 비교해야 했다.
경조증의 시기가 지나간 후에도, 기분은 가라앉았지만- 연구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건 여전히 굉장히 수월하게만 느껴졌다. 보스로부터 어떤 주제가 던져지면- 하루 안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를 정리해서 보내면 나름 세계적 석학인 보스는 내게 "좋은 아이디어네요."라고 하곤 했다. 보스뿐 아니라 공동연구자들도 매번 내가 제안하는 아이디어에 대해 흥미를 보였다. 나는 그런 모든 반응이 낯설었다. ‘내 아이디어가 좋다고?’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느꼈다.
내가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꽤나 자주 생각했다. '나는 왜 아이디어가 없지?'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연구해 나가는 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만이 무언가를 제안하고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연구원으로써의 자질에 대해 매번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프랑스에 갔고, 주어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계속해서 실패했다. 너무 재미가 없어, 새로운 다른 건 없을까 조금 고민하던 때 무언가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마구 생각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보스는 "지금 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니- 그것에 집중해라."라고 했다. 그랬기에 더 깊이 알아보거나 하지 못하고, 그 아이디어들은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그랬던 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모든 게 수월했다. 오히려 너무 아이디어가 많아서 곤란해졌다고 해야 할까. 오늘 낮에는 공동연구진에게서 받은 실험 결과를 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논문들을 살피고 생각하다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를 설명할 새로운 기전이었는데- 아직까지 보고된 바가 없는 내용이었다. '왜 이런 게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해당 내용을 파고들어 조사하고 관련 자료들을 살폈다. 내용을 정리하고는 AI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의 설명과 데이터가 들어맞는다 말했다. (물론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점심을 먹으며, 왜 모든 게 이렇게 수월해진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이 멈추고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글을 써왔다.
혹시 700여 편의 글을 써오던 시간들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