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소중함을 깨닫는다
원로 배우 이순재, 오늘 새벽 별세, 향년 91세
오늘 아침 눈을 뜨고는 정신없이 준비하고 나오느라 휴대폰을 열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살필 새가 없었다. 오피스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는, 하루 작업을 시작하기 전 여유가 있어 포털을 잠시 들어가 보니 이런 기사가 뜨더라. 향년 91세로 오래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좋아하는 연기를 맘껏 하시며 살아가신 분이니 안타까워할 일이 아닌 건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보여줄 연기가 많으셨을 텐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한가득 든다.
이순재 선생님에 대해 딱히 팬이라는 마음보다는, 어쩌다 본 연기에 대한 인터뷰에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는 게 더 맞을 거다.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진지하게 임하시며, 누군가는 젊은 인기 스타들의 열렬한 팬들이 두려워 그저 그들에게 칭찬만 하기 바쁠 때에도 이 분은, "그러면 안돼."라고 단호히 호통을 치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이런 어른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야 한다 생각하곤 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랫동안 티브이 속에서 지켜봤던 한 원로배우의 별세 소식을 들으며, 흐린 초겨울 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죽음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그가 지금껏 이 세상에 남겨온 그의 문화적 유산들과 더불어 많은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내가 어린 시절부터 영화나 드라마 속, 화면으로 접하던 스타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했다. 어쩔 때는 나의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이기에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에서,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까지 겹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난여름에는 헤비메탈의 마왕이라 불리는 오지 오스본이 별세했다. 향년 76세였다. 그의 노래를 즐겨 듣던 팬은 아니었지만, 젊었던 어느 날 한국의 페스티벌에서 한국을 찾은 오지오스본의 무대를 본 기억이 있기에- 그의 죽음이 조금 더 안타깝게 다가온 것 같았다. 5년 여간의 파킨슨 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그는, 바로 죽기 한 달 전쯤 고향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고 했다. 그 공연에서 검은 왕좌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는 "이보다 더 멋지게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열정인가 싶었다. 식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 자신이 쌓아온 무대 위의 업적을 스스로 기리며,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은 모습이 그 어떤 무대보다 감동스러웠다.
왕년의 액션 스타 브루스 윌리스의 소식을 들었다. 알츠하이머로 실어증이 생겨 마지막 영화 촬영을 겨우 끝낸 후, 영화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는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슬펐다. 그 옛날 화면 속을 화려하게 질주하고 시원한 액션으로 즐거움을 주던 그런 강인한 그였는데,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소식이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다
최근에 다시 책을 읽으려 애쓰면서 접했던 반복적인 문구가 있다면, 죽음이 있기에 우리 삶이 가치가 있다는 말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죽음을 완전히 잊고, 삶에만 집중하여 살아가려 한다. 우리의 삶이 유한한 것을 알지만 그 유한함을 무시하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하루는 당연하듯 흘러가고- 우리는 어느 순간 시간이 많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죽음이라는 마지막을 인식하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고, 삶을 더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이가 들어 우리 곁을 떠나는 왕년의 영화, 드라마 속이나 무대 위의 스타들 뿐 아니라- 주변의 누군가의 부모님들. 그 외에도 우리는 종종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충분히 살았으니 누구의 죽음이 더 안타까우냐 할 것 없다. 그저 모든 죽은은 허무하고, 안타까우니까. 일전에 읽었던 최진영 작가의 산문집에서 이런 대목이 있었다. 모든 죽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 된다고 쉽게 받아지는 죽음은 없다고 말이다.
죽음은 언젠가 찾아올 거다. 언젠가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오늘 갑작스러운 사고가 닥칠 수도 있다. 우리 삶도 죽음도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여러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찬란한 삶을 생각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오히려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면- 삶은 더욱이 찬란하게 다가올 것이고,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며 그냥 흘러가는 하루가 아니라, "오늘도 잘 살아내었다."가 된다면- 어느 순간 갑작스레 닥쳐온 죽음 앞에서 그나마 조금은 덜 아쉬울 것 같다.
오늘의 삶을 사랑한 사람에게도, 이별은 언제나 슬플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유한함을 기억하는 만큼 더 찬란하게 살아낼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유한한 삶이기에,
떠나간 이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그의 삶을 기억하려 하고
그들이 남긴 유산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을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