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치가 잘 익어서 라면을 끓였어

by 이확위

어릴 적 엄마는 봄이 다가오면 언제나 달래 간장, 콩나물 밥이나 마른김을 주셨고- 나는 그게 너무나도 싫었다. 어릴 적 달래를 싫어했고, 봄에 엄마가 끓여주는 냉이 된장국도 마치 화장품 같은 맛이라 느꼈다. 엄마는 내게 언제나 제철 재료로 밥상을 차려주셨지만, 내가 그 맛을 몰랐다. 맛을 몰랐기 때문인지, 제철 재료가 얼마나 맛에서 차이가 클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리는 많이 해왔지만 그에 비해 식재료에 대한 이해는 높지 않다. 제철의 개념도 딱히 없다.


어느 날 사 왔던 무가 너무나도 맵고 맛이 없어서 "무가 왜 이래?" 했더니 엄마가 "무는 겨울이 맛있지."라고 하셨다. 여전히 제철 식재료에 대해 무지하지만, 무는 날이 추워질 겨울 쯤이 맛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다.


올해는 가을의 초입부터 물들어가는 낙엽들을 예쁘다며 자주 관찰하다 보니, 어쩐지 평소보다 가을이 오래 지속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알록달록 세상을 물들이던 가을의 단풍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앙상한 가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어느새 겨울이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니, 문득 '무가 맛있어졌겠네'라는 생각을 했다. 냉장고를 살피니, 김치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지내던 시절에 직접 담가먹기 시작하면서, 김치를 먹는 것보다 담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혼자 다 먹지 못할 만큼 김치를 담그고는 매번 모두 먹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니 김치가 없는 지금, 다시 신나게 김치를 담글 시간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바로 재래시장이 있다. 시장이 가까이 없을 때는- 근처 마트를 가곤 했지만, 시장과 마트의 다른 점이라면- 시장에서는 가게들이 여럿 있기에 같은 식재료도 고르는 재미가 더 있다고 하겠다. 어느 집 애호박이 더 예쁘다던가, 어느 집 마늘이 알이 더 좋아 보인다거나. 시장에 들어서면 일단 한 바퀴를 쭉 돌며 살 것을 눈으로 체크한다. 그런 후, 봐뒀던 가게들로 가서 물건을 살핀다. 이런 모든 과정이 나는 너무 즐겁다.


혼자 먹을 김치이기에 무 하나면 충분했다. 무를 하나 들고나니 옆에 총각무가 보였다. 어릴 때는 집에서 매년 엄마가 총각무 김치를 담가 식탁에 내주곤 했었다. 겨울에는 동치미도 해주셨고. 김치를 좋아하는 엄마는 식탁 위에 김치를 3종류씩 올리시곤 했다. 어른이 되고 독립을 한 후로는 어쩐지 총각무를 맛볼 기회가 많지 않다. 식당에서도 섞박지, 깍두기가 대부분이지- 총각무를 내놓는 식당은 가보질 못했다. 그랬기에 총각무김치가 탐이 났다. 그렇게 총가무까지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김치는 단순하다. 육수조차 내지 않는다. 혼자 먹는 김치에 그렇게 애쓰지 않는다.

먼저 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소금에 절여준다. 절여두고는 보통 다른 할 일을 한다. 알람을 맞춰두고, 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절여진 무를 살핀다. 잘 모르겠을 때는 절여진 무를 맛보면 된다.


무가 잘 절여졌으면, 찹쌀풀을 만든다. 물에 찹쌀가루를 넣고 저어가며 끓여준다. 적당히 걸쭉한 농도가 되면 불을 끈다. 나는 조금은 따뜻한 상태의 찹쌀풀에 먼저 고춧가루를 넣어 불려준다. 사실 처음에 찹쌀풀 식히는 게 귀찮아 그냥 넣던 것이 어느덧 나의 방법으로 자리 잡아버렸다. 그런 후, 나머지 재료는 심플하다. 까나리액젓보다는 멸치액젓을 쓰는 편이다. 멸치액젓과 새우젓으로 짠맛을 가해주고, 많은 이들이 매실청을 넣지만 집에 매실청이 없기에 그냥 설탕을 넣거나 또는 욕심을 낸 날에는 배를 갈아 넣는다. 양파를 갈아넣기도 한다. 내키는 대로 한다. 마늘은 듬뿍 넣을수록 맛있다.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서 김치통에 마늘향이 밸 정도는 넣어야 제대로 된 내 취향의 김치가 된다. 이 정도만 넣고 간을 본다. 적당히 간간하면서도 단맛이 감칠맛처럼 혀를 잡아줘야 한다. 물론 너무 달면 안 되고, 그 밸런스는 그냥 경험으로 익혀야 한다. 자신만의 맛의 기준을 잡아가야 한다.


절여둔 무와 양념을 버무린다. 김치는 전용통을 사용하는 게 좋다. 김치 냄새가 맘껏 배어들어도 상관없게 말이다. 김치통에 김치를 넣고는 실온에 보관한다. 나는 익혀서 먹는 게 좋아서 보통 이틀에서 삼일 정도 실온에 두어 적당히 잘 익힌 후, 냉장보관하곤 한다. 김치에 자신이 없다면- 김치를 담그고 다음 날 때쯤 맛을 한번 본다. 이때 부족한 맛을 보충한다. 단맛이 부족하면 단맛을 추가하고, 어쩐지 고춧가루가 부족하면 고춧가루를 더 넣고, 짠맛이 부족하면 액젓을 추가한다. 그렇게 중간점검을 해주면 실패가 없다. 김치가 익어가면 발효되면서 보글보글 김치양념에 기포가 생긴 게 보인다. 기포가 보이면 잘 익은 거다. 기포가 올라왔을 때 난 냉장고로 김치를 옮긴다. (난 김치냉장고가 없다.)


섞박지와 총각무김치가 모두 아주 잘 익었다. 맛을 보니, 같은 양념으로 만들었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무라서 다른 맛을 낸다. 너무 잘 익은 김치가 입맛을 돋운다. 무언가 함께 먹을 것이 필요하다!

김치 하면, 역시... 라면이다.


편의점에 가서 진라면 약간 매운맛을 사 온다. 맵찔이인 나는 아주 자극적인 게 당길 때에나 매운맛을 사고, 순한 맛을 선호한다. 약간 매운맛은 이런 내게 정말 아주 약간 매운맛을 느끼게 해 줘서, 처음 맛보고 바로 빠져들었다.


영양을 위해 계란도 하나 넣어준다. 계란은 풀지 않는다. 완숙이 되지 않도록, 적당한 타이밍에 넣어야만 반숙으로 노른자와 함께 라면을 즐길 수 있다. 인생도 타이밍. 맛있는 라면도 타이밍이다.

섞박지와 총각무김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둘 다 먹기로 한다. 김치를 접시에 담아보고, 잘 끓여진 라면과 함께 한 상 차려낸다.

제철 무로 담근 김치로 차려낸 최고의 한 상이다.

이게 바로 제철 밥상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