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듣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떠난 후, 그 말은 내게 남겨지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말이다. 차라리 들었다면 어땠을까? 덜 상처받았을까? 아니면, 더 깊이 무너졌을까?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그 흔적들이 나를 감쌌다. 그의 목소리, 손길, 그리고 공기 속에 남아 있던 그 특유의 냄새까지. 그것들은 오랫동안 내 옆에 맴돌았다. 벽을 짚을 때마다 손끝에 닿는 차가움이, 마치 그가 없는 현실을 짚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그의 체온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겨진 듯했다. 차가운 이불이 내 피부를 스칠 때마다 공허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왜?”
그날 내가 물었던 질문이었다. 내가 알 수 없던 답을 기대하며. 그는 잠시 나를 쳐다봤고,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미안해.”
그게 전부였다.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은 내게 닿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공중에 흩어졌고, 나는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의 미안함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떠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나를 탓하기도 했고,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남은 건 내가 할 수 없던 것들, 내가 바꿀 수 없던 것들이었다. 사랑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만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나는 그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걸 느꼈다. 그것은 마치 손끝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과 같았다. 처음엔 차갑고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물처럼 흘러내렸다. 남은 건 그저 축축한 공기였다.
그와의 시간은 내게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지나던 그 감각, 그가 웃을 때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그것들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고, 나를 감싸던 순간들은 점점 바래져 갔다. 마치 바닷바람에 색이 바랜 오래된 사진처럼, 남은 건 흐릿한 잔상뿐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끝났지만, 그 끝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서서히 식어가는 과정이었다. 촛불이 꺼지기 직전 깜빡이듯, 우리는 서서히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떠난 뒤, 나는 혼자가 되었고, 그 혼자가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한다. 미안하다는 것은, 그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나에게 했어야 했던 진짜 대답 대신 던진 마지막 방어였을지도.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말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남긴 흔적들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벽에 걸린 사진을 떼고, 그의 냄새가 남은 이불을 정리했다. 그 모든 과정이 아프기도 했고, 때로는 숨 막히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공허함조차 무뎌졌다. 감각은 사라졌고, 기억은 더 이상 날 붙잡지 않았다. 공기 속에 남은 그의 흔적마저도 이제는 사라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 그 말이 그의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던진 마지막 말이었을까? 어떤 의미였든, 이제는 상관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저 바람처럼 지나갔고, 나 역시 그 바람 속에서 그를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