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두 사람은 그 더위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 스치는 바람도 숨이 막힐 만큼 눅눅했고, 길가에 핀 꽃조차 목이 말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여름날의 흔한 한 장면처럼 지나가도 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만남은 무언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은 느낌을 남겼다. 그녀는 한낮의 태양처럼 따뜻했고, 그는 그 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들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여름을 보냈다.
그러나 가을이 찾아왔다. 나뭇잎은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고, 해는 짧아져 서서히 두 사람 사이에도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소한 오해였다. 말 한마디가 서로의 감정을 건드렸고, 그 조그마한 틈은 생각보다 깊어졌다. 그녀가 조심스레 “우리, 잠시 시간을 두자”라고 했을 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가을바람이 차가워질수록 그들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두 사람은 마치 발끝으로 선을 긋듯, 그 거리를 지키며 조용히 헤어졌다.
시간은 흘러 겨울이 찾아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쯤,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눈길을 피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처음엔 서먹했지만, 어색한 미소 속에는 다시금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그녀는 용기 있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그 손을 잡는 것이 두려웠다.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과, 또다시 멀어질까 두려운 마음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웠다. 너무 빠르게 다가가면 다시 잃어버릴 것 같았고, 너무 늦추면 그녀가 떠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천천히, 말없이 그녀 곁에 머무는 것만을 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서로를 다시 사랑한 것도, 완전히 연인이라 불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어색한 연인처럼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말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에게 마음을 보였지만, 그는 똑같이 망설였다. “조금만 더...” 그의 말속에는 조심스러움과 불확실함이 엉켜 있었다. 그녀는 그 불확실한 기다림 속에서 점차 힘이 빠져갔다.
그러던 어느 여름, 마침내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그가 무심코 그녀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했을 때였다. 그녀는 조용히 답했다.
“나, 다른 사람이 생겼어.”
그 말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그를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지만, 그가 이미 어딘가에서 느끼고 있었던 결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조심스러움 속에서 둘의 관계는 천천히 닳아가고 있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둘은 사랑도, 연인도, 그리움도 아닌 미련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감정이었고, 끝나지 않은 그리움이라기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들의 관계는 마치 여름날 지친 나뭇잎이 떨어지듯 서서히 소멸해 버린 미련이었다. 그는 그 미련 속에서 그녀를 잡지도, 더 이상 기대지도 않았다.
가을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홀로 길을 걸으며 그 기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여름날, 그리고 2년 동안 이어졌던 어색한 만남들. 그 모든 시간이 마치 한 권의 책을 덮듯 끝이 났다. 그때의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속하지 않았고, 그는 그녀를 떠올리며 더는 아프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기억을 조용히 접어두는 일만 남았다.
나뭇잎이 다시 떨어지고, 바람은 서늘하게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