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지만, 그날따라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창밖에는 희미하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이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와 방 안을 가만히 물들였다. 시계의 초침이 또박또박 흐르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더욱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네가 꿈속에 찾아왔다.
너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네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끝은 닿지 않았다. 넌 마치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졌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너는 내가 붙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내 안은 어지러웠다. 꿈에서 본 장면이 현실과 뒤섞이며 마음속에서 떠돌았다. 떠나가는 네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고, 그 아득함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잃어버린 듯한 감각이 나를 뒤덮었다. 네가 없는 미래,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느껴지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있었다. 네가 나에게 건네는 말들은 늘 그렇듯 사소한 일상이었지만, 나는 그 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마치 마지막인 듯 귀 기울였다. 네가 뭔가를 말할 때마다 잔잔하게 떨리는 네 목소리가 내 안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마치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처럼, 나에게 부드럽게, 하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그 사람은 정말 다정해.”
네가 다른 사람을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나에게 내리치는 비수처럼 들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내 앞에서 너는 밝게 웃었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너에게 나는 그저 네가 잠시 쉴 수 있는 바람막이였다는 것을. 진정한 피난처는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었고, 나는 그저 비 오는 날 잠시 머물다 갈 우산이었다.
“좋겠네. 정말 너한테 잘해주는 것 같아서 나도 기뻐.”
말을 뱉으며, 나는 그 너머로 보이는 네 모습을 바라봤다. 바깥 풍경은 흐려졌고, 유리창에 비친 네 모습만이 유일하게 선명했다. 네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나를 향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너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고된 결말이었다.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어딘가에 각인된 듯했다. 다만 나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내 꿈속에서 네가 떠나는 장면은 그 마지막을 나에게 은밀하게 알려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들은 마치 바닷가의 모래 위에 쓰인 글씨 같았다. 파도가 밀려오면 결국 사라질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그것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파도는 이미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네가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를 건넬 때 나는 알았다. 이 인사가 언젠가 네 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돌아오는 길,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붐볐지만,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이 한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차들의 소음은 멀어져 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 홀로 그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네가 떠난 빈자리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빈자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밤이 다시 찾아오고, 나는 또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다시 너를 보았다. 이번에는 네가 말없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네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질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네가 떠나는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