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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formoflove Nov 06. 2024

나에게는 씨앗이 하나 있었다. 그저 조그마한, 특별할 것 없는 씨앗. 그 씨앗은 내가 가진 전부였고, 그것은 긴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햇빛이 비추어도, 가끔 물을 뿌려주어도 씨앗은 여전히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그러한 상태로 나는 몇 년을 살아갔다. 세상이 무겁게 흘러가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지루한 시간들이 지나가도 씨앗은 그저 그렇게 씨앗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나타났다. 너는 깊고 따뜻한 흙이었고, 나는 그 속에 나를 묻을 수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품었고, 나는 그 속에서 싹을 틔웠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싹이었다. 내 존재의 일부가 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가 정말로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지켜주었다.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 영양, 물, 따스함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단순한 씨앗이 아니라 자라나는 존재가 되었다.


싹은 점차 자라나, 줄기가 되고 가지가 되었다. 너의 도움으로 나는 나무로 변해갔다. 나무가 되어감에 따라 나는 조금씩 주변의 세상도 알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와 내 잎을 스치고, 새들이 내 가지에 앉아 쉬며 노래를 불렀다. 햇살은 나를 따스하게 감싸고, 벌레들은 내 나뭇잎을 기어 다녔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나는 점점 더 위로 자라나 하늘에 닿고자 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다.


너는 여전히 나를 지탱해 주었고, 아무런 대가 없이 나에게 계속해서 모든 것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너는 단지 나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저 열매를 맺어 다오. “ 그 말은 내게 사소하게 들렸다. 열매를 맺는 것이 내 역할이었고, 그 이상의 꿈은 나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자랐고, 새들과 벌레들이 나를 찾아오며 나는 점점 더 자유를 갈망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너는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잎은 무성해졌고, 나는 그저 자라기에 바빴다. 그러나 너는 물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조금씩 말라가며 내 몸을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너는 나를 더는 단단히 지탱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 날, 나는 바람에 흔들리며 크게 쓰러졌다. 뿌리는 흙을 놓고 말았고, 나는 땅에 엎어져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너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너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었다. 그저 내가 자라도록, 내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도록. 그러나 나는 너를 잊고, 너의 존재를 잃어가면서 나도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너 없이는 내가 살아남을 수 없었음에도 나는 너에게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내 주변의 하늘, 새들, 햇살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고, 너는 그저 나를 붙잡아 두는 족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는 완전히 말라버렸다. 흩날려 사라져 가고, 나를 붙잡아 주던 너는 흔적조차 없이 날아가 버렸다. 나 또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너 없이는 나는 그저 메마른 나무에 불과했다. 땅에 엎드린 채로, 더는 하늘을 보지 못하고 서서히 부서져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내 자유를 갈망했던 그 높고 빛나는 꿈들이, 사실은 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너의 사랑 없이는, 너의 아낌없는 희생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이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너를 잃은 것은 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너는 사라졌고, 나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마지막 남은 바람이 내 잎을 스치고, 그리워진다. 네가 나를 품어주던 그 시절이, 나를 아낌없이 지탱해 주던 네 사랑이. 나는 그저 죽어가며, 너와 함께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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