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압제를 이어가던 시절 이야기다.
작곡가 이시우 선생이 악단을 이끌고 한인들 거주지인 간도에서 순회공연을 하기 위해 두만강 도문의 한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넓은 강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어 잠 못 이루고 있던 어느 날 밤,
한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 여관주인에게 사연을 물었더니,
그 여인은 여관주인의 친구 김증손녀(金曾孫女)였다.
그 여인의 남편 문창학(文昌學)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났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애를 태우며 만주 일대를 찾아 헤매던 중,
닷새 전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 문창학은 만주에서 일경에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10여 전에 형이 집행되었으며 그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여인은 여관주인의 도움으로 뒤늦은 제사를 지내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는 사연이다.
이에 크게 감명을 받은 이시우는 그 자리에서 노래 한 곡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담았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는 김용호 선생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가사를 만들어 세 살 아래 청년 가수 김정구를 통해 음반으로 제작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일제의 숱한 견제로 크게 히트하지 못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애달픈 가사와 정조로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살아계셨더라면 115세, 96세가 되셨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애창곡이며,
모든 이의 막걸리 집 애창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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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임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절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3절
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기계식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지그시 두 눈을 감고 따라 부르시던 두 어른의 모습과 함께
김정구 선생의 맑은 음색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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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요 초창기엔 전문 작사가가 따로 없어 시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해 작사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찬찬히 음미해 보면 가사가 매우 곱고 아름다우면서 색다른 점이 있다.
이 곡의 노랫말 역시 그렇다.
당시 김정구 선생의 맑고 애잔한 음색을 느낄 수 있는 귀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