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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사와 산다

by 신화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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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祭祀(제사)를 모시는 날이다.

러일 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즉 120년 전에 돌아가신 첫 번째 증조모님 기일이다.

첫 출산의 고비를 못 넘기시고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니 안타깝고 애처롭다.

조부님 이하 모든 후손이 당신의 혈손은 아니지만 최고 어른으로서 기일이 되면 정성껏 모신다.


차남이신 증조부님으로부터 나는 세 번째 장남이다.

아직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시니 忌祭祀(기제사)만 여섯 번, 설날, 추석 차례까지 합치면 총 여덟 번의 제사를 모셔야 한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제사를 물려받은 지도 이제 20년이 넘은 것 같다.


시시때때 돌아오는 제사를 묵묵히 정성껏 준비해 주는 아내가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제삿날 내가 하는 일이라곤 제사를 주관하고 무거운 것을 나르고 紙榜(지방)을 준비하고 밤 껍질을 벗기는 정도일 뿐 오직 아내 혼자 다 한다.

오랜 세월 인상 한번 안 쓰고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는 아내를 보면 가끔 사람인가 천사인가 헷갈린다.


옛 선비 집에서는 제사와 손님 대접을 가장 중요한 일로 친다.

이 두 가지만 잘하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하더라도 대개 용서받을 수 있었단다.

제사와 손님 접대, 양반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풍습이다. 이의 없다.


아내와 내가 살아 있는 한,

제사는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이지만 먼 훗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유학의 조선이 망한지도 이제 115년이 되었는데 이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제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짐작조차 어렵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많은 가정에서 폐지되거나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우리 집이라고 대세를 피할 수 있으랴.


세상 모든 일은 즐겁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제사도 마찬가지다.

생일 파티처럼 즐거울 수는 없을까.

아직은 딱히 생각하고 있는 바 없지만 내 남은 생애 동안 꼭 다시 정립해서 자손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즐거운 제사.


내일은 아내와 가까운 교외로 나가 데이트라도 하고 올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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