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써서 멈추게 하는 제동장치
“아유, 써! 엄마 이런 걸 왜 먹어요?”
커피가 내려질 때 향이 좋아서인지 아님 매일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아이들이 어느 날 커피가 먹어보고 싶다고 하길래 맛을 보여주었다. 자기들은 안 주고 어른들만 하는 건 다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고 할 때 코끼리 생각만 하는 게 인간이니까. 금지될 때 더욱 궁금한 법이다. 아이들은 혀끝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기겁을 하고 이제는 커피 근처에도 안 온다. 도망치는 아이들이 귀여워 웃으며 커피를 마신다. 쓰긴 하지. 그런데 나는 이 쓰디쓴 커피를 왜 마시나.
솔직히 커피맛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이 안 깨는 카페인 중독도 아니다. 자주 마시게 된 건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 난 하루 중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차분한 시간을 사랑하는 거였다.
차가운 음료는 벌컥벌컥 들이켜게 되지만 온도가 높은 것은 천천히 마시게 된다. 갓 나온 커피는 너무 뜨거워 입도 못 데니, 살짝 찬 물을 타 식혀먹는다. 너무 쓴 것도 못 먹는다. 이럴 거면 진짜 커피를 왜 마시니. 하지만 목을 넘기는 따뜻함과 향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한 모금 한 모금씩 커피가 들어갈 때마다 여유를 생긴다. 무엇이든 재빨리 해치워야 하는 내 몸에 제동을 걸어준달까. 바쁜 일상 속 여유 버튼이다.
어쩐지, 커피 브랜드들이 카페인 함량이나 성분 및 영양분이 아닌 ‘한 잔의 여유’를 강조한 광고를 하더라니. 이제야 어른의 마음을 이해한 걸까. 아니 마케팅의 노예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면 나도 광고의 한 장면처럼 유럽의 어느 파티오에 앉아 생각에 잠긴 독립적인 여성이 된듯한 착각에 빠지니까.
여하튼 고요한 아침에 따뜻한 물 한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난 후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소중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며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낸 후 다시금 차분하게 맞는 오전의 여유를 사랑한다. 아이들이 덕분에 왁자지껄하고 생동감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지만, 엄마가 되니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나 소중하다.
커피는 혼자 타임의 최고 메이트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도 빠지지 않는다. 강의를 하는 날에도 시작 전에 함께 대화 나누며 한 잔, 지인들을 만났을 때에도 자리 잡고 앉아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언제 커피 한 잔 해요’라는 말이 식사자리보다는 가볍고 부담 없는 만남을 기약하는 말이 되었다. 커피는 자기가 이렇게 대단한 존재가 될 줄 알았을까.
책이나 신문을 보거나 글을 쓸 때도 한 잔을 옆에 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집중이 시작된다. 왠지 예쁜 찻잔에 담긴 따뜻한 커피는 미디어보다는 아날로그적인 활자들과 잘 어울린다. 그 감성에 취해 오늘도 집중이 잘 될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앉아본다.
따뜻한 음료를 컵에 두고 향을 즐기며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잠시 멈추게 된다. 커피는 특히 쓰니까 한참 있다가 다시 마시게 된다. 그렇게 손도 입도 마음도 잠깐 논다. 식사를 할 때에는 시선을 책과 신문 등에서 아예 뗄 수밖에 없지만 커피는 그냥 한 손으로도 마실 수 있어 그런가. 읽어나가다 말고 잠시 멈춰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샛길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한다.
커피 덕분에 책상에 혼자 앉아 고요해지니 저절로 끄적거리고 싶어 졌고 그렇게 다시 매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커피라는 여유 버튼에 이제 ‘난 집중한다’라는 의미까지 붙어버렸다. 심리적 부담감이 없는 힐링의 순간에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행동을 하나 엮게 된 거다. 집중을 필요로 할 때 꽤 괜찮은 트리거가 되어주었다. 어느 순간 글이 쓰기 힘들어졌을 때 커피 한잔은 그렇게 날 도와주었다.
지금 보니 이 정도면 거의 한 잔 중독이구만. 술을 매일 들이켜는 게 아님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커피는 줄여봐야겠다는 맘이 한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공정무역 커피를 마셔도, 커피 재배가 기후 온난화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영 신경 쓰인다. 또 아이들에게 안 먹이는 건 이유가 있는 법, 나는 어른이라고 몸에 나쁜걸 막 집어넣는 것도 죄책감이 든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언젠가는 커피를 완전히 끊어볼까 싶은데. 시작하는 것은 단계적으로 늘릴 수 있지만, 관두는 것은 차차 관두는 건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건 뭐지. 단번에 딱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나의 여유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으려나? 꿀꺽꿀꺽 마실 수 없는 나만의 여유 버튼을 또 찾아봐야지. 아무래도 사극 드라마 속 우아한 그들처럼 차를 마셔야 할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