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과 잘한다는 것에 대하여
눈썹을 그리고 눈두덩이에 살짝 음영이 들어간 쉐도우를 바른다. 그 위에 분홍빛이 들어간 쉐도우를 바르고 아이라인을 그리고 속눈썹을 붙인다.
아침에 강의 준비를 위해 화장을 하다 말고 불현듯 맨날 똑같은 방법으로 화장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좀 더 예뻐 보이겠다고 립스틱도 여러 개, 쉐도우도 여러 개를 갖고 있는데 맨날 쓰는 것만 쓴다. 같은 쉐도우를 쓰고 같은 방식으로 화장을 한다. 그야말로 딱 하나로 정해진 나의 화장법이라니 드디어 단순 해진 건가. 선택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데 뭐 하나만큼은 자동화된 상태가 되어주어야 머리가 쉴 테니 정말 기쁘다.
그런데 왜 그런 거지? 옷은 그래도 몇 가지 착장을 적당히 돌려가며 바꿔 입는데 왜 유독 화장은 맨날 똑같이 하는 걸까. 강의 갈 때만 화장을 하니 여유 없이 바쁘게 빨리빨리 해서 그런가. 분명 요렇게도 저렇게도 해보고 싶고, 옅은 색을 이용해서 안 한듯한 화장을 해보고 싶은데 말이지. 신기한 건 속마음과는 달리 그리 안 해도 꽤 만족스럽다는 거다. 다양함을 동경하지만 현실은 맨날 똑같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지겹지 않다. 금세 질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부분이 있다니, 참 의아하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는 이래서 매일 똑같은 옷을 입었던 걸까. 선택을 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생각을 더 집중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했던지라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매번 다른 옷을 입는 그런 삶은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지만 또 매번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도 너무나 지겨웠다. 재미가 없었다. 패셔니스타도 미니멀리스트도 안 되는 또 중간 어느 지점이다.
답답한 와중에 생각이 스친다. 아 그렇구나, 매번 같은 옷을 입는 그들은 아예 지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반복이 편안함을 주는 분야가 각기 다르며, 그 반복 안에서도 새로움을 입히고 싶은 부분이 다 다를 수 있으니까. 어느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옷을 다양하게 입을 수 있을 테고, 누군가는 요리도 이것저것 해볼 거다. 종류별로 다양하게 각 상황에 맞는 샷을 연구할 수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 등의 분야에서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미디어의 수많은 크리에이터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해낸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둘 중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꽤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나 역시 무엇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 건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좀 더 시행착오를 줄이고 싶었고, 다들 무엇을 답으로 하며 살아가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잘하는 것을 먼저 해서 밥벌이를 한 후 좋아하는 것도 하라는 현실적인 답변, 싫어하는 걸 하지 않게끔만 하며 살면 된다는 예상외의 답변들도 나온다. 또 좋아하는 것은 계속하다 보면 결국에 잘하게 될 테니 더 좋아하게 될 테고, 잘하는 것은 잘해서 좋아하게 되니 그 두 가지가 나중에는 같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이들 한다.
무엇이 정답일까. 각각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으니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인생의 문제들이란 뭐 하나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다. 나도 뭐라 딱 하나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신한다. 자연스레 다양함을 추구하게 되는 그 무언가에 자신이 나아갈 방향의 힌트가 있다고.
단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변화를 주며 하고 싶다는 마음, 이건 익숙함이 기본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 거다. 그 익숙함이 능숙함이 되면 저절로 기존 것과 좀 더 다르게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들 테고, 나만의 아이디어를 좀 더 적용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즉, 잘한다는 것은 다양함에 욕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잘하지 못할 때에는 어떤 기준에 쫓아가기만도 바쁘다. 하지만 익숙해져서 잘하게 되면 나만의 방식을 집어넣고 싶어 진다. 무언가를 할수록 범위가 확장되며 깊이가 깊어진다.
또 좋아해서가 아니지만 뭔가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다양성은 발휘된다. 조금 더 빨리 끝내고 싶고, 지적받지 않기 위해 좀 더 잘 해내려 하는 상황들 안에서 분명 발전한다. 어쩔 수 없이 때려치우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으려는 그 마음은 그 안에서 또 다른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 즉 창의성을 계발시키게 된다. 피난길에 다방 구석에서 담배 싸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화가 이중섭이나, 카페에서 냅킨에 글을 쓴 해리포터의 조앤 롤링을 볼 때면 창조력은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서 나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해와는 별도로 단순히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잘하게 되는 상태까지 되기가 쉽지 않다. 싫증 나면 그만두고 싶어 지는 게 본능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고 힘들며 여의치 않은 상태임에도 그것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바로 그곳에 나의 잠재력이 숨어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나 나나 피아노를 배웠을 때 가장 싫어했던 것 중 하나는 하농(Hanon) 책을 따라 끊임없이 반복하는 연습이었다. 바이엘을 끝내고 이제 나도 멋진 곡을 칠 수 있나 싶은 기대감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하농은 재미도 없고 정확하게 치지 않으면 혼이 났다.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곡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이걸 쳐야 하나, 파란색 표지의 두꺼운 그 책이 그리도 싫었다.
그런데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콘서트 리허설 무대에서 그 곡을 쳤단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치는 그 하농을 만 18세의 나이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실력자가 여전히 치고 있다는 거였다. 좀 더 기교를 부리기 위한 다른 연습을 했을 법도 했을 텐데 말이다. 콩쿠르 기간 내내 새벽 4시까지 연습했었고, 우승했다고 실력이 느는 건 아니라며 달라진 게 없다는 겸손한 그의 답변에 이미 감동받았던 터다. 괜스레 스스로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를 보며 존경심과 함께 여러 생각이 샘솟았다.
임윤찬 군은 피아노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진짜 좋아한다는 건 이런 마음이라는 걸 그를 통해 진하게 느꼈다.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틀리지 않는 지겨운 연습도 기꺼이 해낸다. 혹시 모를 나태함을 이기기 위해 매일의 루틴을 가진다. 내게 필요한 연습이라면 체면을 차리지 않고 해낸다. 손만 뚱땅거리는 기교만 가득한 반쪽자리 음악가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확성을 넘어 답이 없는 어느 부분에서는 남들과 다른 색도 뿜어낸다.
음의 길이를 연주자의 감정과 해석에 따라 늘였다 줄이는 것이 가능한 ‘템포 루바토’라는 음악기호가 있다. 나는 삶에서 그런 기호를 만날 때마다 과연 담대할 수 있는가 생각해본다. 마음대로 펼쳐낼 수 있는 자유를 열망하기보다 내게 더 필요한 건 그 순간을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는 실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순간에 그 실력을 갖추기를 소망하기보다 오늘도 해내야 하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마음이 먼저일 테지. 야망이나 절실함 없이도 계속하고 싶고, 실패해도 상관없고, 다양성이 요구되는 것이 기쁘게 다가오는 분야에 -지금 제겐 글쓰기입니다만- 열정과 시간을 쏟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