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에 도착해 처음 마주한 풍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다. 웅장한 역사적 건축물과 현대적인 건물들이 한 장면 안에 뒤섞여 있었고, 유명 랜드마크뿐 아니라 주거용 아파트들조차 제각각 독특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거친 콘크리트 건물들에는 오래된 목조 발코니나 이국적인 문양의 철제 창틀이 툭 튀어나와, 획일적인 아파트로 빼곡한 서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사이사이로 특히 눈에 들어온 건 거리 곳곳에 자리한 스트리트 아트와 그래피티였다. 어떤 것은 무심하게, 또 어떤 것은 강한 색감과 개성 있는 표현으로 벽면 위에서 묘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곳에는 돌아갈 날짜가 없는 편도 티켓으로 들어왔다. 관광지를 바쁘게 훑는 여행이 아니라, 여름 초입에 시작된 느린 일상이었다. 트빌리시를 선택한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코카서스 산맥의 광활한 풍경, 화창한 기후, 맛있는 와인이 많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이 도시에 머무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한 달 남짓 머무는 동안, 대부분은 목적 없는 산책을 이어갔다. 작업하기 좋은 카페나 조용한 골목을 찾으며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지도 앱에 저장하곤 했다. 거리에서 자주 마주친 스트리트 아트와 그래피티도 그랬다. 눈에 띄는 작업을 발견하면 일단 사진을 찍고, 돌아와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이 도시의 맥락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그렇게 트빌리시, 더 나아가 조지아의 과거와 현재, 사회문화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거리 예술의 배경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트빌리시의 스트리트 아트는 단순히 도시 미관을 위한 장식이 아니다.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감각,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성을 함께 담고 있다. 조지아는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했지만, 이후 내전과 경제 위기, 영토 분쟁을 겪으며 오랜 시간 혼란과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왔다. 이 격동의 흔적은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낡은 소비에트 시기의 공공시설, 거칠고 웅장한 인상의 브루탈리즘 건축물, 유럽풍의 아르누보 양식, 최근 들어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이 층층이 겹쳐 도시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대와 스타일이 충돌하고 겹쳐 있는 도시에서, 거리 공간은 단순한 통행로를 넘어 도시와 시민의 감정, 시대의 변화가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스트리트 아트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보다는 그것을 마주하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려는 시도다. 특히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거리 위에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 억눌렸던 목소리, 획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예술을 통해 사회에 질문을 던지려는 태도가 이 작업들에 담겨 있다. 트빌리시의 벽화와 그래피티에는 체제 변화에 대한 시선, 개인성과 공동체성의 의미에 대한 고민, 그리고 조지아 사회가 안고 있는 정체성의 흔들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시각적으로 새겨져 있다.
이 도시의 거리 벽은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자,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공공의 대화장이다. 트빌리시의 스트리트 아트는 그렇게 시민들이 스스로 공간을 해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하나의 장이 되었다.
다른 많은 거리 예술 문화와 마찬가지로, 트빌리시의 스트리트 아트 역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 탈소련 시기, 내전과 극심한 경제 위기 속에서 허물어진 벽과 방치된 소비에트 시대의 구조물 표면은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시 차원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거리 예술은 창작 활동을 넘어 도시 환경과 정체성 회복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이 자발적인 움직임이 제도권의 관심과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니코 무브먼트(Niko Movement)’와 같은 로컬 이니셔티브가 있었다. 작가들을 위한 장비 지원, 벽면 확보 등의 현실적인 기반이 마련되면서, 개인의 실험적 작업은 보다 체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특히 젊은 아티스트들에게는 이것이 도시 공간에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되었고, 스트리트 아트는 점차 정기적인 문화 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출범한 ‘트빌리시 뮤럴 페스트(Tbilisi Mural Fest)’는 이 흐름의 확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한 첫 해를 시작으로, 지금은 시 전역의 대형 벽화를 공공 전시 형태로 선보이는 연례 행사로 자리 잡았다. 페스티벌을 통해 지금까지 수십 점의 대형 벽화가 트빌리시에 조성되었고, 최근에는 바투미, 쿠타이시, 고리 등 다른 도시로도 작업이 확장되며 스트리트 아트는 도시 정책의 한 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트빌리시에는 스트리트 아티스트와 작품을 소개하는 공식 웹사이트뿐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아카이브 페이지와 지도도 있다. 시내를 걷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몇 점을 이 글에 소개한다. 물론 이 외에도 수많은 작품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작품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는 공식 웹사이트, 개인 아카이브, 작가들의 SNS를 참고했으며, 출처는 함께 표기해두었다.
Fintan Magee
시드니 출신의 사회 현실주의 아티스트. 도심 외곽이나 버려진 공간에 대형 벽화를 그려왔다. 거울에 가려진 인물 형상을 통해 장소에 응축된 감정이나 이야기를 담는 작업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런던, 비엔나, 로마 등 여러 도시에 퍼져 있다.
Tina Chertova
조지아의 디자이너이자 인권·페미니즘 활동가. 전통 문양과 강렬한 색을 활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그래픽적으로 구성한다. 장식적인 요소와 진지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1010
폴란드 출신으로, 현재는 독일 함부르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벽에 구멍이 뚫린 듯한 착시 효과의 추상 벽화를 그린다. 한순간 공간이 휘는 듯한 시각적 경험이 흥미롭다.
Dante (David Mchedlishvili)
조지아 작가로, 멸종 위기 동물을 주제로 한 직설적인 메시지의 벽화를 그린다. 트빌리시 파브리카 인근의 코뿔소 그림이 대표작이다.
Kuba
독일 출신의 작가로, 트빌리시 니코 무브먼트를 통해 두 점의 해양 생물 벽화를 작업했다. 오징어나 고래 해골처럼 낯선 생물이 도심에 나타난 느낌이 흥미롭다.
Monkeybird (Monkey Bird Crew)
프랑스의 아티스트 듀오. 스텐실 기법으로 동물과 상징을 조합한 정밀한 벽화를 제작한다. 작품이 놓인 거친 벽돌 벽과 섬세한 선묘, 기하학 구조가 밀도 있게 어우러진다.
Avtandil Gurgenidze
조지아 작가로, 니코 무브먼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트빌리시에 벽화를 남겼다. 강한 색과 현대적인 형태 조합이 시선을 끈다.
Giorgi Maskharashvili
연극·미디어 분야에서도 활동하는 조지아 작가. 기묘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벽화를 그리고 있다. 뾰족한 귀를 가진 강렬한 얼굴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외출 중 거리에서 벽화들을 마주친 날이면, 집에 돌아와 오늘 본 벽화들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고 위치를 다시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리서치를 즐기는 편이라, 온라인 아카이브나 비공식 지도를 참고해 내가 본 작품과 작가가 어떤 맥락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어느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벽화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마치 나만의 장소를 찾아낸 듯한 작은 성취감도 따라온다. 이 도시를 떠날 때까지 또 어떤 작업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스트리트 아트와 같은 결로, 이 흐름은 도시 재생 공간인 ‘파브리카(Fabrika)’나 ‘스탐바(Stamba)’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두 공간 모두 옛 건물을 보존하면서 예술과 디자인, 젊은 창작자들의 감각이 스며든 복합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https://www.instagram.com/tbilisimuralfest
https://www.kathmanduandbeyond.com/street-art-tbilisi-geor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