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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가 아내바라기는 아니지

괜찮으니까 괜찮아

by 이디뜨

아이들이 크고 내 하루의 마무리는 샤워와 티브이시청, 독서가 된 지 좀 됐다.

좋아하는 향초를 켜고 필요한 조명만 켜둔 채 조용히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 이 시간에는, 잠이 오기는커녕 머릿속이 맑아져서 집중하기에 좋다.

이날도 리클라이너 소파 끝자리에 앉아서 읽던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내 고요를 깨는 주인공은 거실로 나와 저벅저벅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편이었다.




다정일까? 참견일까?

남편은 자려고 하는 딸에게는 "자?" 하면서 굳이 말을 걸었다. 공부를 하는 딸에게는 "쓰면서 해라!", "아빠가 알려 줄까?" 하다가 이내 방에서 쫓겨났다.

"하하핫. 왜 아빠 쫓아내?" 하면서 쫓겨 나오는 남편의 모습은 오래 보아온 딸바보 아빠의 모먼트이다. 50대 아빠의 요란한 애정 표현을 부담스러워하는 딸들을 위해 때론 내가 중재자가 된다. 아빠들은 사춘기 딸, 아가씨가 된 성인 딸을 엄마만큼 섬세하게 대하지는 못하니까.




갱년기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부부 사이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평화롭다. 한 사람은 안방에서, 한 사람은 거실에서.


"뭐 해?"

딸의 방에서 나와 거실창을 닫으며 남편이 물었다.

딸바보 아빠의 모먼트를 보고 나면, 나도 살짝 관심이 받고 싶어진다.

"ㅇㅇ아빠! 나 담요 좀 가져다주면 안 돼?"

나는 리클라이너를 올려 침대처럼 해놓고 책을 펼치고 있었다.

남편은 "담요 이거?" 하고 가져오더니, 펄럭! 하며 담요를 요란하게 펼쳐 덮어 주었다.

담요를 받으려고 뻗은 내손은 공중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엉덩이에 스며드는 차가운 느낌과 차가움의 실체를 동시에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커피 쏟았다."

담요는 갈색으로 물들고, 화들짝 놀라 일어선 내 엉덩이 쪽에는 세계 지도가 그려졌다. 협탁에 있던 식은 커피가 펄럭이는 담요자락에 쓸려서 내쪽으로 쏟아진 것이다.


"왜? 무슨 일이야?"

엄마의 비명에 놀라 방에서 뛰어나온 딸들은, 어찌 된 일인지 상황파악을 하고는 깔깔깔깔 숨넘어가듯 웃어젖혔다.

"엄마! 아빠가 또 '아이고 집이 제일 좋지?' 하면서 펄럭! 하면서 담요 덮어줬지?"

"엄마가 그냥 갖다 달라한 건데 굳이 펄럭! 하네. 너네 상상이 가지?"

'아빠가 또...' 하는 상황이라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함께 웃던 남편도 "그러게 왜 커피를 거기 둬?" 하고 머쓱하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 원래 우리한테도 발끝까지 이불 덮어주고 가잖아."

"너네 아빠 뭐든지 오버해. 다정도 넘치고, 짜증도 넘치고. 응?"

나는 얼룩진 담요와 옷을 애벌세탁하면서 한참 동안이나 깔깔거리는 두 딸의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미안해! 괜찮아? 커피가 거기 있는 줄 몰랐네. 내가 닦을게. 당신 얼른 씻어."

내가 원하는 대답은 꿈속에서나 들어야지.

"놀랬지? 나 담요 덮어주려고 했는데 커피가 쏟아져서. " 나도 쉬이 이런 말을 못 하니 피장파장이다.

열정이 넘칠 땐 작은 실수에도 파르르 했다. '미안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지구 끝까지 쫓아갈 듯 굴었다.

'시간'은 뾰쪽한 송곳도 무디게 한다. 많은 것을 별일 아니게 해 준다.


"괜찮아?" 한 마디쯤 안 들어도 괜찮다. 온 가족에게 '펄럭!' 하고 이불은 잘 덮어주니까.

그것이 아빠 특유의 다정한 몸짓임을 온 가족이 알고 있으니까.

이날 나는 체리 향초의 달콤한 향과 은은히 남은 커피 향을 맡으며 좀 이른 잠을 청했다.

핀트는 나갔지만, 딸들과 교감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근심 없이 잠들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막내딸의 서비스 2025.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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