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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호박죽을 다시 먹을 수 있다면

동생과 나, 호박죽 속 엄마의 잔상

by 이디뜨

"마지막 호박죽이야."

나는 호박죽 그릇을 식탁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어 카톡을 보냈다.

뒷베란다에 차갑게 둔 호박죽 솥에서 마지막으로 싹싹 긁어 담은 호박죽이었다.

잠시 뒤 동생의 카톡이 왔다.

"나도 먹어야지. 삶은 밤이랑 소금, 설탕 좀 더 넣고 끓였어."

"나 몇 끼를 연속으로 밥 대신 호박죽 먹었잖아. 반찬이나 찌개랑 먹는 것도 잘 어울려."

잠시 뒤 동생도 마지막이라며 한 그릇을 더 뜬 사진을 카톡에 띄워 보내왔다.

"한 그릇 더. 이제 마지막이야."

위아래 층에 살 때였다면 먹으러 올라와, 내려와 하고 마주 앉아 먹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카톡으로 함께 먹었다.

차가운 호박죽을 한입 떠서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음미하면

내 눈앞에 엄마가 계시고 동생도 있다.

내게 호박죽은 그런 음식이다.




추석 때 시댁에서 가져온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끓였다.

어머님이 "호박 가져갈래? 호박죽 끓여 먹어라!" 하시기에,

"네 가져갈게요."라고 대답할 때 이미 생각했다.

'호박죽 끓여서 동생이랑 나눠먹어야지.'

어떤 음식에 한해서는 남편이나 자식들보다는 동생이 먼저 떠오른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어릴 적 엄마가 해주셔서 동생과 함께 먹고 자란 그런 음식말이다.

겨울에 엄마가 호박죽을 한솥 끓여서 뒷베란다에 두시면, 나는 스텐 밥그릇을 들고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차가운 호박죽을 간식으로 먹곤 했다.

자기 전에 배가 고파도, 공부하다가 출출할 때도 속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이었다.

모습을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셨다.

"호박죽은 따뜻하게 먹어도 맛있고, 차게 먹어도 맛있지? 많이 먹어. 호박죽은 살 안 쪄."


엄마의 호박죽은 좀 특별했다.

엄마는 팥을 넉넉히 넣어 끓이셨기 때문에 엄마의 호박죽은 붉은 갈색을 띠었다.

찹쌀을 불려 투박하게 갈아서, 죽이라도 혀에 쌀알이 적당히 느껴지는 식감도 좋았다.

성인이 되어 뷔페에서 호박죽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아는 갈색 호박죽이 아니어서 나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단호박으로 이유식을 끓여본 후에야 나는, 일반적인 호박죽 색이 노랗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늘 먹고 싶었던 호박죽은 엄마가 끓여 주셨던 진한 색의 호박죽이었다.

동생과 나눠먹어야지 생각했을 때부터 나는, 엄마 호박죽의 색과 맛을 그대로 구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드디어 호박죽을 끓이는 날, 호박을 잘라서 찜통에 올리고 팥은 압력솥에 따로 삶았다.

그런데 팥을 충분히 불리지 않은 탓인지 팥이 덜 익었다. 이대로 끓이면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물을 넣어 팥 압력솥을 불에 한번 더 올렸다.

아뿔싸!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탄내가 올라왔다.

뚜껑을 여니 빨갛게 익어야 할 팥 껍질이 군데군데 눌어붙어 까맣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타지 않은 팥만 골라내어 팥을 조금만 넣고 호박죽을 완성했다.

설탕과 소금은 일부러 조금 부족한 듯 넣었다.

간이 세져서 물을 넣어 수습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호박죽이 놋그릇에 고이 담아 임금님 수라상에 오를 만한 완성도였다면, 내 호박죽은 '이것은 호박죽이다.' 정도의 완성도라는 생각에 멋쩍은 웃음이 났다.

그래도 먹어본 가락이 있어서인지, 호박죽의 농도나 맛이 조금은 엄마의 호박죽에 근접한 거 같았다.


시계를 보니 우체국 마감시간이 다가왔다.

커다란 냄비에 가득 끓인 호박죽이 식는 데 한참 걸려 조바심이 났다.

얼음정수기에서 물과 얼음을 한가득 떠서 호박죽을 식히는 사이에 동생네에 보낼 택배박스를 준비했다.

동생이 예약해 준, 수료식 날 갔던 펜션 사장님이 트렁크에 실어주신 오이와 호박을 반 나눠서 챙겨 넣었다.

아들 군생활 건강하게 마무리하길 바란다는 덕담과 함께 챙겨주신 귀한 텃밭 채소였다.

동생몫으로 호박죽을 넣자 조카들 생각이 나서 과자와 핫팩도 챙겼다.

그렇게 택배를 보낸 게 며칠 전이다.



호박죽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우리 집 아이들은, 한 입만 먹어 보라는 내 말에 정말 맛만 보고는 더 이상 호박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엄마는 호박죽이 그렇게 좋아?"

"호박죽은 엄마가 너네만 할 때 가장 즐겨 먹었던 간식이야. 할머니가 끓이신 호박죽이 얼마나 맛있었는데."

마라탕, 떡볶이에 길들여진 입맛에 호박죽이 맛있을 리 없다.


마지막 한 그릇을 야무지게 떠먹으며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표 호박죽을 다시 먹을 수만 있다면...'

같은 추억을 가진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다.

조금 부족하나마 내가 끓인 호박죽에 엄마를 떠올리며 쉬어 갈 수 있으니까.

부단히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삶이란 계속되지만, 때론 잠시 멈추어 충전해 줘야만 더 세차게 나아갈 수 있다.

맛으로,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추억의 음식은 삶 속에 스며들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 그릇 뚝딱 했으니, 다시 힘을 내보자!


펜션 사장님이 주신 오이와 호박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https://omn.kr/2fzj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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