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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가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3] 프랜시스 드 고야

'The Third of May, 1808'(1814), 프라도뮤지엄

프랜시스 고야의 그림 '1808년5월3일'(1814)은 전날 일어난 프랑스 군대에 대한 스페인 반란군의 폭동의 여파로 민간인을 무차별 처단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빈 손의 포로들은 프랑스 군대의 총칼 앞에 무력하기만 합니다. 맨 주먹을 휘둘러 보기도 하고 애원의 눈길을 보내도 보지만 프랑스 군대는 이미 총칼을 든 인간병기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등을 돌리고 일렬로 서서 총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들에게 눈 앞의 인간은 과녁으로 입력되어 있을 뿐입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의 신호를 보내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날아드는 총알일 것이며 그들도 이내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희생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떠한 기적을 바랄 수 있을까요? 그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이 악몽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야 할까요? 그들은 왜 죽이고, 죽어야만 할까요? 인간이 벌이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인 전쟁을 그린 고야의 이 그림을 보며 기어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광기와 폭력,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스페인 왕 3대에 걸친 통치 기간은 물론 중간에 침략 정부인 프랑스 나폴레옹 제국이 들어선 때에도 변함없이 궁정 화가의 자리를 지킨 고야는 겉으로 보기에는 시대의 부침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계몽의 시대였고 이성과 합리에 바탕한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던 고야의 내면은 더 없이 혼란스럽고 절망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792년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침대에만 누워지낸 뒤 그의 청각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시선은 더욱 예리해져 갔고 그의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져 갔습니다. 그의 그림도 당연히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테피스트리를 위한 스케치를 그리면서 화가의 삶을 시작한 고야의 초기 그림들은 당시 인기있던 로코코풍 및 베니스풍의 영향을 받아 전원에서의 한가롭고 목가적인 여가와 유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왕족과 상류층의 초상화 또한 고야의 특기 영역이었습니다. 기품있고 우아한 자세와 오목조목 아기자기한 얼굴, 화려하고도 정교한 의복의 표현은 그를 최고의 초상화가가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번득이는 예리한 시선과 은근한 풍자 및 조롱의 뉘앙스가 느껴지지기도 했습니다. 어떠한 의심에도 적당히 둘러대고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은은하고 교묘한 수준이었지만 말입니다. 의뢰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청각을 잃은 후 1799년 그가 그린 80점의 동판화 'The Caprichos'는 본격적으로 사회비판적 태도가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마녀, 유령, 괴물 등이 등장하는 이 그림들은 혼란과 야만을 야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꼬집고 있습니다. 비록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모든 사회에 만연한 보편적인 인간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킨 것이었지만 당시 특정 인물들에 대한 비판을 시사하면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판매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왕조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변화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카를로스 4세의 아내 루이자 왕비와 그녀의 정부 고도이 재상에 의해 권력이 쥐락펴락되던 시대였습니다. 왕권과 결탁해 어마무시한 힘을 행사하는 종교재판은 서슬퍼런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민중의 불만과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잔인하고 우매한 투우 경기에 열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정부가 침략했을 때 고야의 마음은 복잡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시대로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구호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은 얼마 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나폴레옹 정부는 폭압적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몰고 왔습니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일어난 반란 세력의 저항과 이에 대한 잔인한 응징이 이어졌습니다. 위의 그림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야의 시각과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솔직하고 절망적인 마음은 1810년부터 1820년 사이 완성한 82점의 판화 'The Disasters of War'였습니다. 이 그림들은 전쟁의 참화가 훑고간 뒤의 참혹한 상황, 무참히 처형되거나 사지가 잘려나간 시체가 나뒹굴고 부녀자를 상대로 약탈과 강간이 이루어지는 참상을 잔인하게 그려냈습니다. 상세한 묘사는 생략한 채 배경을 거친 스트로크로 처리하고 오로지 비극적인 결과나 상황을 간결하고 투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끔찍하고 잔인한 참상에 숨을 멎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절망과 실망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진정 이래야만 했을까, 인간으로서 이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의 상황에서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됩니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 그 이상으로 그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었을 일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기도 합니다. 이에서 오는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감은 물론, 이러한 극단적이고도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전쟁이 꼭 일어나야만 하는 것인지, 인간의 결정에 대한 비난을 거두기가 힘이 듭니다.  

이러한 그림들을 그린 고야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괴롭고 처참한 심정, 답답하고 절망적인 심정이 느껴지고도 남습니다. 그가 목도한 전쟁의 참상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 인간에 대한 어두운 시각과 통렬한 비판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났습니다.

'Saturn Devouring His Son'(1820-1823), 프라도뮤지엄

특히나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의 시골에서 지내며 자신의 집 벽에 그려넣은 기괴하고도 음산한 그림들은 '블랙페인팅(Black Paintings)'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왕좌를 아들의 반란으로 빼앗기게 되리라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은 사투르누스의 모습을 그린 'Saturn Devouring His Son'(1820-1823)이 대표적입니다. 

정상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일, 제 정신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잔인한 일을 행하고 있는 모습은 공포와 광기가 가득한 그의 눈에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초점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희번덕한 두 눈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에 다름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 인간(동물, 자연 모두)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그림 속 인물은 인간으로 불릴 수 없는 괴물의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참혹해서 차마 눈을 뜨고 계속 보고 있기가 괴롭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인간의 잔인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아차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한 고야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고통스러운 전쟁의 경험 이후 오히려 더욱 더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로 퇴보하는 위정자들, 혹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고야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고야의 그림을 끔찍하다고 여기며 외면하거나 수수께끼처럼 기이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야의 외침이 정말 들리지 않나요? 알고도 모른 체하는 건가요?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가요? 블랙페인팅이 그려진 고야의 집은 '귀먹은 자의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귀먹은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림은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 않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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