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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8] 폴 세잔

사과 바구니(1895), 시카고 미술관

사과가 가득담긴 바구니가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습니다. 바구니에서 굴러 떨어진 사과들이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네요.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어찌 저리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일까요? 우연일까요? 테이블 가운데 놓인 유리병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있고 좌우도 대칭이 아닙니다. 오른쪽 접시 위의 빵이 더욱 가관입니다. 무슨 블럭 쌓기 놀이를 한 것처럼 세로로 두 줄, 가로로 두 줄 번갈아가며 쌓아 올렸네요. 이쯤 되면 화가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작위적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세잔은 분명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과로 파리를 놀래키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포부를 밝혔을 때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과를 넘치도록 그려넣은 그의 그림을 보고도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그림은 기존의 그림 입장에서는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잔은 착각그림기법(illusionistic)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이란 자고로, 마치 실제 사물이나 풍경, 인물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그리는 것이고, 이는 그림 그리기의 기본인데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입체감을 표현해야 합니다. 즉,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감을 주고 대상의 부피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원근법을 활용하거나 명암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잔의 그림에서 원근법은 제각각의 시점을 사용해 통일감이 없고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한 명암법도 균일하지 않고 불규칙적입니다. 물론 구겨진 테이블보를 통해 입체감을 주었고 단축법을 통해 거리감을 주었습니다. 그림자도 표현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전혀 정교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도 사실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둘째, 색깔이나 질감, 형태 표현을 사실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잔의 그림 속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이 사과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가 가능합니다. 원래 사과라고 하면 연상되는 전형적인 모양과 색깔만 얼추 들어맞으면 우리는 그것이 사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과와는 차이가 엄청납니다. 애초에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하지 않은 것이지요. 크기도 제각각, 색깔도 제각각,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접근이 더 사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사과도 완전히 똑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문제는 제각각인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인 것이었습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면서 편한대로 늘이거나 줄이고 변형하고 생략했습니다. 색깔도 대충 비슷하게만 칠한 것 같고 질감은 사과든, 빵이든, 유리병이든, 접시든, 테이블이든, 테이블보든, 벽면이든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거칠기만 할 뿐이죠. 

세잔의 의도대로 그의 사과를 보고 놀라기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과를 왜 이런 식으로 그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렇다면 세잔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세잔은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파리의 에콜 드 보자르 입학에 실패했고 살롱에서도 낙선을 일삼았습니다. 외곬의 고집과 괴팍한 성격으로 파리의 다른 예술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성격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림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 반 아카데미 움직임은 인상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살롱과의 차별화를 선언하며 독립적으로 열리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초기 세차례 참가하기도 했고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가르침으로 그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세잔이 원하는 것은 인상주의가 추구하는 것과는 그 결이 달랐습니다. 

인상주의가 순간의 것을 포착하고 이를 위해 물감을 흩뿌리듯 캔버스에 짓이기고 형태를 뭉개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세잔은 보다 견고하고 영속하는 것을 바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보이는 것 이면의 원형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원기둥, 원뿔, 구 등 단순한 모양으로 귀결되었죠. 그의 그림은 점차 특정 모양들을 쌓아올리고 인위적으로 모양을 왜곡하는가 하면 색깔도 원하는 효과를 위해 자의적으로 조합하는 등 사실적인 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색도 표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대신 다소 가라앉은 톤을 사용해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초기 평면적이었던 색깔의 표현은 시간이 갈수록 비슷한 색조의 그라데이션을 통해 공간을 창출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은 결코 즉흥적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도 오래 걸렸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의 그림이 언뜻 무질서하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사실은 전체적인 균형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세잔이 추구한 것은 그림이라는 것이 갖추어야 할 원칙을 제시하고 그림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나 단지 자연을 보이는 대로 재현한 그림은 그림의 목적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그림은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한꺼번에 보여주되 이를 조화롭고 균형있게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인물화를 한번 볼까요. 세잔은 처음에는 초상화를 시작으로 인물화를 그렸지만 뒤로 갈수록 초상화가 아닌 불특정의 인물을 그렸습니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시리즈나 카드 플레이어 시리즈, 목욕하는 사람들 시리즈가 그것입니다. 그의 인물화는 사람의 외모나 성격 등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역시나 그림이 주인공이고 단지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일 뿐이었죠.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1888-90), 워싱틴국립미술관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1888-90)은 소년조차도 일종의 소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느 하나 돋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빨간 조끼가 눈에 띄네요. 

겹겹이 층을 이루는 풍성한 커텐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선의 소년이 서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바깥쪽으로 주름진 커텐을 따라 소년의 얼굴은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는 반면, 왼쪽을 향하여 놓인 의자 등받이를 따라 몸은 비스듬히 왼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소년은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지만 그 중심이라는 것이 견고하거나 올곧은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워 보입니다. 조끼의 단추여밈과 바지 자크로 이어지는 중심선은 오른쪽으로 휘면서 끝은 왼쪽으로 날렵하게 구부렸습니다. 커텐의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죠. 색의 조합 또한 눈에 띄는 빨간색을 제외하면 배경색과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의 색이 통일감있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렇듯 세잔의 그림에서는 소년이 보이는 대신 선과 색의 전체적인 조화와 짜임새있는 구성이 눈에 띄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조각이나 건축을 그림으로 구현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눈속임 기술을 통해 사실처럼 그리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시시각각 쫓아 표현하는 것은 세잔에게는 피상적으로만 느껴졌나 봅니다. 대신에 그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투박하지만 단순하게, 거칠지만 우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이런 깊은 생각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쉽지 않았겠지요. 말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한 세잔의 그림은 곧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에 담긴 심오함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감과 통찰이 되었습니다. 고갱, 피카소, 마티스 등 많은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사서 소장했죠. 그림의 정수가 그곳에 들어있었던 까닭입니다. 크기도 모양도 색도 제각각이고 시간이 지나면 썪고 말라비틀어지는 사과에서 세잔이 길러낸 것은 뜻밖에도 사과라는 본질과 힘의 결정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그의 여정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무엇일까요.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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