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이것은 꿈인가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10] 앙리 루소

The Dream(1910), 뉴욕 모마

꿈이 분명합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정글 속. 그 속에는 신기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가지각색의 초록잎들이 하나하나 살아있고 파란 꽃과 오렌지색 열매가 자라는 정글이라니요. 그 사이사이에 사자, 뱀, 원숭이, 새가 다소 뜬금없는 피리 소리에 고요하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뜬금없는 것은 벨벳 소파 위의 누드 여인입니다. 소파까지 통째로 정글에 옮겨진 여인은 조금도 거리낌없는 편안한 자세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사자의 동그란 두 눈은 최면에 걸리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그림을 보는 관람객처럼 어리둥절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꽤나 익살스럽습니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다면 정말 환상적이지 않을까요. 




앙리 루소의 작품 'The Dream'(1910)은 그의 정글 연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자신이 죽은 그 해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통행세를 징수하는 사무소에서 세금 징수원으로 근무하다 1893년 49세에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전업 화가로서의 늦은 시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족을 부양하느라 공무원으로 일했지만 그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4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일과 그림을 병행하면서 1886년부터 살롱 데 앙데팡당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루소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습니다. 명암은 전혀 없이 생생한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원근법은 무시한 채 대상의 크기가 제각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공간감이 표현되지 않았기에 평면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 같았습니다. 모든 대상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세히 묘사하거나 형태와 움직임이 부드럽지 못하고 뻣뻣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루소의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독특한 스타일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들로 작용했습니다. 대상의 크기를 과장스럽게 대비시키거나 모양을 필요에 따라 왜곡시킴으로써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이질적인 것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신비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마치 박제된 것과 같은 기이한 고요함을 선사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기에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의 권위적이고 제한적인 규칙들에 반기를 든 파리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루소 자신은 아카데미 예술에 대한 야망을 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풍경화나 인물화를 넘어 역사적인 장면이나 우화적인 의미를 담은 커다란 사이즈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루소의 나이비테(naïveté)한 스타일은 영웅적인 사건과 진지한 서사를 담은 아카데미 스타일의 그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살롱전에서는 매번 낙선을 했고 앙데팡당전에만 전시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조차도 조롱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품이 정글을 주제로 처음으로 그린 그림 'Surprised!'(1891)였습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환상은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을 사로잡은 주제였습니다.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바깥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죠. 이는 약간의 공포심을 동반한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정글만큼 이를 만족시켜주기에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루소는 단 한번도 프랑스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복무할 때 멕시코에 파견 근무를 다녀온 동료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마도 그 때부터 루소는 열대우림의 정글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가 봅니다. 

루소가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정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파리 근교의 동물원과 식물원, 잡지 등에 실린 사진을 통해서였습니다. 주말마다 그곳을 찾아가 들여다보고 기록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겠지요. 루소의 상상을 통과한 식물과 동물은 그의 캔버스에 신비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창조된 루소의 그림 속 정글은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합니다. 다시 위의 그림을 볼까요? 전면에 위치한 식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불시에 그 촉수를 뻗을 것만 같고 뒷편에 겹겹이 포개져있는 짙은 녹색(알려진 바로는 적어도 22단계의 농도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의 수풀들은 암흑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가리워진 수풀 사이로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정글 속 동물들 또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인의 존재는 어떤가요.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듯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손을 뻗쳐 식물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옅은 살빛은 그 가운데서 밝게 빛나고 있지만 야생의 정글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어 위험에 노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왠지 모를 긴장감과 공포심이 느껴지는 것은 일시정지 상태에 놓인 야생의 정글이 언제 다시 생과 사를 가르는 피비린내나는 현장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간신히 평화로운 공존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정글 가운데 우뚝 서서 피리를 부는 검은 여인 덕택인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암흑 속에 완벽히 가려져 형체가 제대로 분간이 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뒤에 숨어서 이 모든 일들을 해내고 있습니다. 

'The Snake Charmer'(1907), 오르세 미술관

사실 뱀을 부리는 여인은 루소의 이전 그림에서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The Snake Charmer'(1907)라는 제목의 그림은 루소의 그림을 지지하고 애호하던 화가 로베르 들로네의 어머니로부터 의뢰받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은 들로네의 어머니가 인도 여행 당시 경험했던 내용을 듣고 이를 토대로 그렸다고 합니다. 

검은 밤, 보름달이 뜬 호숫가에 서서 피리를 부는 여인은 완벽한 밤의 화신입니다. 달빛을 역광으로 받아 오로지 실루엣만으로 표현된 그녀는 융단처럼 긴 머리칼에 다부진 몸매를 갖추었습니다. 목에는 뱀 한마리를 두르고 있고 그녀 주변으로 몰려든 뱀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플라맹고인듯 아닌듯한 분홍깃털의 새와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앉은 부엉이, 초록색의 새 두마리도 밤의 향연에 동참하고 있네요. 




무슨 마법을 부리길래 모든 자연이 그녀의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일까요.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시간 속, 한번 도 가본 적 없는 어딘가에 놓여있다는 환상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쫓겨 기계적으로 움직이거나, 익숙하고 진부한 공간에서 무료함을 느낄 뿐이죠. 

아마도 루소는 삶의 많은 부분을 공무원으로 살면서 그 누구보다도 이를 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서는 많은 것들에 얽매이고 제한되어 원하는 바를 마음껏 이룰 수 없었겠지요. 이러저러한 원칙과 규범을 이유로 모험과 도전을 용납치 않았겠지요. 따라서 그에게 그림은 꿈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캔버스를 이러저러한 대상들로 구성하는 것은 모두 루소의 상상력과 자유의지에 따랐습니다. 마치 마법을 거는 뱀부리는 여자처럼 말이죠. 그에게 마법은 바로 정글을 그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초현실주의의 시작을 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어디에서 본 듯하지만 분명 낯설고, 기이하고 괴상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한 그의 그림은 현실과 상상이 퍼즐처럼 조합을 이룬 꿈의 한 장면에 다름 아닙니다. 식물과 동물이 가득한 깊은 정글 속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루소는 꿈 속을 거닐었을 것입니다. "온실 속으로 들어가 낯선 땅에서 자라는 기이한 식물들을 보면, 나는 마치 꿈 속에 있는 듯하다."라고 루소는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꿈이 분명합니다. 


이전 09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