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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23. 2021

무엇을 보고 있나요?

[그림이 던지는 질문들-6]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얘술가 아내의 초상, 잔 에뷔테른'(1918), 노턴 사이먼 박물관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참 독특합니다. 어느 유파나 이즘으로 묶기가 힘이 듭니다. 때문에 모딜리아니 자신은 물론 당시 비평가들은 '모딜리아니적'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독특함을 표방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인체와 아몬드 형태의 눈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이와 더불어 약간 비스듬히 눕힌 고개와 기다란 타원형의 얼굴, 말도 안되게 긴 코, 작게 오므린 입술, 마치 기둥 역할을 하듯 곧고 긴 목이 특징이었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처럼 말이죠.




여인은 몽상에 잠긴 듯도 하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아니면 마네킨처럼 껍데기만 남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인지 모르겠는 모호함, 무어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함이 그의 그림에는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라는 태생적 이력이나 병약하고 외톨이적인 성향, 또는 다소 반항적이고 방탕한 삶의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당시 아방가르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파리에서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질풍노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파리는 아카데미에 반동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예술의 물결로 가히 백가쟁명의 시대라 불릴 만 했습니다. 파리에 첫 발을 디딘 모딜리아니는 그러나 딱히 어느 무리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밀어붙일 정도로 정치적이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 실험을 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기만 했을 뿐이었죠. 

초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커미션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신만의 고집이 있어서 의뢰인의 취향에 맞춰주거나 의뢰인을 기분좋게 할 만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친구나 이웃, 거리의 사람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심지어 카페 손님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주고 푼돈을 받아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렌트비를 마련하지 못해 그의 그림으로 대신 내기도 했죠. 다른 직업을 병행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 뿐이었으니까요.

큰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다보니 생활은 궁핍했고 어릴적부터 병약했던 탓에 건강은 날로 나빠졌습니다. 젊은 시절 발을 들인 마약에도 빠져있었고 술은 알코올중독 수준으로 마셨습니다. 궁핍한 중에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면서도 옷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준수한 얼굴까지 한 몫 해 그의 옆에는 연인이 끊이지 않았죠. 관계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지만요.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그림을 살롱에도 전시할 기회가 있었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실망감에 그림을 접고 조각에만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조각가 브란쿠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돌을 조각해서 두상을 만들거나 기둥을 떠받치는 여인상(caryatid)를 주로 제작했습니다. 1912년 살롱에서 여덟개의 조각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역시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더욱 확고히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길고 갸름한 얼굴, 그 중심을 관통하다시피하는 기다란 코, 그 위와 아래에 바짝 붙은 옆으로 긴 눈과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입이 특징입니다. 바로 '모딜리아니적'인 초상화의 원형이 구축된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세잔의 영향도 받고 톨루즈 로트렉의 스타일도 차용해 거칠고 뭉개진 선과 투박한 색칠, 어두운 톤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면 이후부터는 보다 정돈되고 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선 처리와 밝고 선명한 색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사색적인 느낌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아마도 좌우의 불균형 및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초상화는 비교적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눈동자도 선명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초상화는 좌우가 대칭을 이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거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거나 눈이 짝짝이거나 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의 불균형을 가져와 얼굴의 생김새에 집중하게 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이미지와 분위기를 바라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표정이 무표정에 가깝다보니 인물의 외모가 아닌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인물이 어떠한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힌트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은 경우가 꽤나 많기에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보면서 눈동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모딜리아니는 왜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가 자신의 최후의 동반자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한 말을 참고로 해봅시다. "당신의 영혼까지 알게 되는 그 때 당신의 눈을 그릴 것이오." 아마도 모딜리아니는 눈동자에 그 사람의 영혼을 그려넣을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딜리아니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인으로서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에 오기 전 로마, 플로렌스, 베니스 등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체의 표현을 넘어 인간의 심리와 내면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초상화에서도 인간의 외모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느냐의 문제보다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감정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영혼까지 담아내는 초상화라니요. 그 대상이 정말 친근하고 각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이러한 초상화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모딜리아니는 인물의 영혼을 눈동자에 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지막까지도 그리지 못하고 차라리 그냥 비워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눈동자를 그려넣는 것보다 그리지 않는 편이 신비롭고 중의적이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에 비워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눈 하나로는 밖의 세계를 보고, 또 다른 눈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본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보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속 인물들은 몽환적이면서도 다소 혼란스러운 듯, 또는 불안한 듯 느껴집니다. 자신이 놓인 바깥의 세계와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사이좋게 공존하기란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요. 더구나 세상과의 불화가 일상이었던 모딜리아니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잠시 휴면 상태에 있기로 한 것 같습니다.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의 평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휴지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부디 평화와 공존의 가능성이 열리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들이 충분히 시간을 갖고 다시 한번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어 활기차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화상)1919), 상파울로 현대미술관

모딜리아니가 죽기 1년 전 그린 자화상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 결핵과 장티푸스로 죽다 살아난 그는 평생 병약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병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방탕한 삶이 병의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입니다. 그토록 강렬하고 험난했던 삶에 후회는 없지만 이제는 세상과의 화해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잔 에뷔테른을 만나고 다소 안정적인 삶을 이어갔고 자신의 창작 활동을 위한 에너지도 새로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날이 악화되는 건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눈으로는 바깥을 바라보고 한 눈으로는 내면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평정을 모색하면서 이를 그의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림 속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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