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내게 레고놀이다. 글자를 이어 붙여 성을 쌓거나 집을 짓는 것이다. 글자가 이렇게 저렇게 합체, 조립되면서 뜻이 생기고 변하고 분화된다. 신기한 일이다. 레고가 없었던 유년시절의 결핍이 그런 식으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군입대를 앞두고 시간이 남아 동생이 보던 한자능력검정 3급 책을 나도 공부했다. 정리정돈 한자라는 책도 추가로 구입해 부수별로 분류해 한자를 체계적으로 암기했다.
한자는 형성자 원리로 만들어진 글자가 대부분이다. 글자의 한쪽은 뜻을 나타내고 또 다른 쪽은 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자(江)를 보면 글자의 왼쪽(水)은 뜻을 나타내고 나머지 공자(工)는 음을 나타난다. 공이 강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자를 외울 때 물과 관련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음은 공이나 그 비슷한 발음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이 부분과 아래 일부분이 학문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고치려다가 뜻만 통하면 되니 그냥 두기로 했다.)
더 나아가 여기에 나름의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도 재미있다. 물 사이에 다리 같은 모양이 있는 걸로 보아 큰 물이겠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번거롭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자 한 자 외우다 보면 레고 블록을 쌓아서 튼튼한 집을 짓고, 로봇이 서로 합체해 더 멋지고 강한 로봇이 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아무튼 입대 전 3급 시험장에서의 기억은 창피와 충격으로 남아있다. 시험감독관은 시험 시작 전 “4학년 손들어 보세요” 하며 차례로 4, 5, 6학년 학생수를 파악했다. 나와 몇몇 주부들만 성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1800자 수준의 3급 시험은 어려운 시험인데 초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수모를 당했다 생각하니 분통했다.
입대하고 나서 2급 시험을 준비했다. 훈련소에서는 폐지 분리수거함에서 주운 신문 속 한자 코너로도 공부했고, 자대 배치받고 나서는 교재를 사서 주경야독했다. 일병 초기에 땄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시험을 보았고 전역 일주일 전에 보았던 1급 시험은 어른들이 많았었다.
복학 후 검정회에서 주관하는 사범급 시험을 준비했다. 대학 전공을 제쳐두고 그 시험에만 몰두했다. 1급까지 3500자를 외웠으니 추가로 1500자를 더 외워야 했다. 중국의 역사서, 유교 경전인 사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한시 등 범위는 상당히 넓고 교재도 상당히 두꺼웠다. 시험장에 가보니 할아버지들만 있었다. 초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수모를 당했던 아픈 기억을 한문 고수 어르신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기억으로 앙갚음한 것이다.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에 입사해 언젠가 선현의 옛글을 현대의 말로 옮기는 게 꿈이었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문 원문의 맛을 알고 감상할 수준은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한글 번역을 같이 보지만 그 맛은 아마 번역본만을 읽는 사람보다 훨씬 풍미 있고 깊을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날의 한문 공부 열기는 그걸로 된 셈이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어 고문진보를 펼쳐 관련 글(희우정)을 읽는 것도 좋고 장자의 붕새가 활강하는 첫 장을 원문 느낌대로 읽는 것도 좋다. 내 한문 지식을 앞으로 삶을 감상하는 데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