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잡념에 시달리지 않으려 평소보다 좀 일찍 잠에 들었다.
쉬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금세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어지러운 꿈을 꾸다 눈을 뜬 건 새벽 2시 30분경.
저 멀리 병원에서 생애 그 어느 밤보다 긴긴밤을 보내고 있을 '엄마'생각에 다시 잠을 청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아침에 눈이 떠졌으면 좋았을 것을.
가만히 누워있으니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조용히 방을 나와 컴퓨터를 킨다.
4월 11일.
나는 그렇게도 소원하던 수술을 한다.
3주 전 마지막 종양내과 진료를 보던 날 진료를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서는 나를 향해 교수님이 한마디 하셨다.
"엄청 큰 수술인 건 알고 계시죠? 어쨌든 수술 잘하시고 좋은 모습으로 다시 뵐게요."
당연히 큰 수술인 건 알고 있는데 또 이렇게 꼬집어서 겁을 주시네. 하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그래, 나는 아주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컨디션관리 잘하라, 밥 잘 챙겨 먹어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해 준다.
평생을 내 걱정보다는 남들 먼저 챙기며 살았던 나여서, 처음에는 그런 시선들이 참 불편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염려 어린 시선에 적응하기도 한 듯하다.
때로는 가족처럼 가까운 이들에게는 가끔씩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투정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다.
암환자라서 특별하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게 불편하고 싫을 때도 있고, 때로는 '저기요~ 저 암환자거든요'하고 암환자라는 주홍글씨를 더 활활 불태워 연민의 감정을 이끌어내어 편의를 얻고 싶을 때도 있으니, 이래저래 양가감정 사이에서 이 특별한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기도...
수술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나도 어느 때마다 마음이 쪼그라들어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상황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러 쪼그라진 마음을 펴보려 애쓰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주변의 염려 어린 관심도 그대로 받고, 이 시간만큼은 나만 생각하기로.
그래, 나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이 밤 나는 잠을 다시 청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3녀 1남의 셋째 딸로 태어난 내게 엄마는 참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시부모님을 모셨고, 이후에는 한량인 남편시집살이 하며 네 아이를 거의 혼자 키우셨고, 그 와중에 맞벌이도 하셨으니 그 삶의 고단함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허구한 날 사고 치는 둘째와 막둥이를 돌보랴, 그 와중에도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 애썼던 삶을 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엄마'의 그 바쁘고 고달팠던 삶의 한편에서 나는,
'나도 좀 봐달라고, 나도 여기 있다고, 내 자리도 좀 만들어달라'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나는 살면서 '철이 없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철없이 투정 부릴 수 있는 이들이 참 부러웠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고 그것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그들은 알까.
엄마의 삶에 쉬지도 않고 빼곡하게 들어앉아 버리는 걱정거리들로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혼자 서는 법을 익혔다. 아니, 익혀야만 했다.
나까지 그 고단함을 보태줄 수는 없었기에.
얼마 전에 언니와 엄마랑 얘기 중에 엄마가 그런 말을 했었다.
"주혜 니는 뭐든 다 알아서 척척 잘하고, 착하고, 엄마말도 잘 들었으니 엄마가 신경 쓸 게 없었다."
아빠도 그런 말을 한다. '우리 주혜는 공짜'라고.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잘 자라고 지금껏 엄마, 아빠한테 잘한다고.
그 말이,
대견한 마음에서 나온 칭찬임을 알면서도 참 서운했다.
신경 쓸 게 없었다가 아니라 신경을 써주지 않았기에 나는 투정 부릴 대상을 잃었었다.
공짜가 아니라 비싼 아이가 되고 싶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상황에, 환경에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엄마, 아빠는 오늘까지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월요일아침 교복을 찾았는데 교복이 없어서 당황하다 빨래통에 처박혀 있던 교복을 발견했던 기억이 난다.
동생의 교복은 잘 다려져서 동생의 방에 걸려있었다.
더러운 블라우스를 다시 입고 울면서 학교로 가는 길.
나는 이후로 내 교복을 내가 스스로 빨아 입었다.
언니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엄마는 졸업선물로 금목걸이와 금팔찌를 선물해 줬었다.
우리 주혜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 해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때 형편이 어려웠다는 이유로.
항상 형편이 어려울 때 1순위로 밀려나는 존재는 나였다.
학교 가는 등록금도 내가 벌었고, 결혼 전 직장에 다닐 때 엄마가 넣어주기로 했던 5년 동안 모은 적금은 그 시기에 변변하게 돈벌이가 없었던 엄마, 아빠의 생활비로 다 사라졌었다.
결혼하기 직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이미 결혼한 두 언니들처럼 부모님이 뭔가를 해주시길 바라지도 않았었다.
단지 내가 모은 것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미안해하는 엄마 앞에서 모질지 못했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무일푼으로 결혼해야 하는 남편에게는 "나 같은 여자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오빤 복 받은 거야"라고 큰소리쳤지만, 많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타파웨어'란 브랜드를 결혼하고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참 요긴하고 잘 쓰이는데 가격이 사악해서 하나를 사려고 맘먹기가 힘들었었던 기억이 난다.
몰랐을 땐 그러려니 했으니 이후 큰언니집에서 타파웨어 반찬통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와 언니 좋은 거 쓰네'라고 했는데 시집갈 때 엄마가 세트로 해주신 거란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또 한 번 사무쳤었다.
결혼하고 힘든 형편으로 여러 번 이사를 해야만 했던 큰언니집에는 이사할 때마다 냉장고며 새로운 가전들이 엄마의 선물로 채워졌다.
하지만 내가 이사할 때는 엄마는 화장지 이외에 뭔가를 주지 않았었다.
이것저것 자리잡기 위해 분투하는 작은언니를 위해 엄마가 여러번 도움을 준 것도 뒤늦게 알았다.
나는 엄마, 아빠 먹고살기도 바쁜데 하며 넘겼지만, 늘 여유롭지 않았던 엄마, 아빠는 다른 자식들에겐 그렇게도 뭔가를 해줄 여유가 있었나 보다.
그게 나를 또 슬프게 했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쑤다]에 보면,
부모는 못해준 것만 생각나고, 자식은 서운한 것만 생각난다던데.
그 말이 맞긴 한가보다.
같은 '엄마'라도 자식들이 느끼는 그 엄마의 존재는 다 다를 것 같다.
남들이 봤을 땐 멀쩡한 부모님에 다복한 가정처럼 보이겠지만, 그 속에서도 서열은 나눠지고, 부모님이 비춰주는 햇살이 닿지 않는 그늘에 존재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깊고 높은 나무들로 우거진 골짜기 아래쪽 그늘진 곳에 햇빛을 받으려 애쓰는 작은 나무가 보인다.
분명 모든 숲을 다 덮을 만큼 큰 햇빛과도 같은 존재임은 분명한데, 다른 나무들에 가려서 내게까지 닿을 햇빛은 한참 모자란듯한.
모자란 햇살의 결핍 속에서 자생하는 법을 찾은 사람이 나였다.
때때로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다 같은 자식인데 왜 엄마는 나에게만 이럴 수 있을까라고.
내가 결혼 후로도 정말 잘 알아서 삶을 일궈내고 잘 살아서라고 엄만 얘기하지만, 언제까지나 내게 줄 관심의 자리는 엄마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가 미울 때도 많았지만, 또 그 삶을 들여다보면 참 열심히 살았던 한 여자가 보여 애틋하기도 하다.
그래서 언니들과 동생은 내가 엄마에게 이런 애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른다.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키우는 양육방식이 달랐으니 각자가 받은 사랑은 각자만 아는 거다.
그런 내가,
아프고 나서 엄마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니 뒤늦게 얼마나 불편하고 어색했었는지.
이제야 그 관심에 익숙해졌는데...
오래전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던 엄마는 최근 들어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
몇 걸음만 걸어도 숨쉬기가 쉽지 않고, 자면서도 호흡이 불규칙해서 수술이 최선의 결정이 되었다.
아산병원까지 몇 번을 오고 간 후에 엄마는 4월 4일 금요일에 수술을 했다.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잠시 멈추게 한 다음 판막이랑 늘어난 대독맥을 바꾸고, 부정맥도 수술하는 큰 수술이다.
통상적으로 하루정도면 깨어나서 일반병실로 올라가는데 엄마는 회복속도가 굉장히 더딘 상태다.
목구멍에서 심장까지 연결된 관 때문에 고통스러워 섬망증세까지 보이고 무심결에 자꾸 떼어내려 해서 손을 묶어놓은 상태라 한다.
동생이 보내준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일요일에(오늘) 호흡기를 빼내고 나면 섬망증세는 없어진다 하니 다행이고, 이후에 심장이 잘 작동하기를 바랄 뿐이다.
수술 전 사전검사 시에 목구멍으로 호수를 집어넣는 과정에서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몸살이 났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걸 온종일 꼽고 있어야 하니 지금 엄마의 괴로움이 얼마만큼일까...
중환자실에 있어서 면회시간 외에는 볼 수 없어서 어제저녁즈음에 병원에서 동생 편으로 전화가 왔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서 엄마가 호흡기를 떼 달라고 했다보다.
동생은 내가 너무 걱정할까 봐 말을 아꼈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새벽에 잠에 깨어 그런 엄마를 떠올리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다.
엄마의 힘들고 긴긴밤을 함께 해드릴 수 없음에 목이 메고, 또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릴 때면 사무침이 밀려온다.
너무 힘들어 몸이 축나버려서 회복을 더 못하시는 건 아닐까 걱정 끝에
수술직전에도 "니는 니만 생각하면 된다. 엄마는 괜찮다"하더니,
이렇게 또 엄마는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며칠 후에 있을 수술실에도 맘 편히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리는 엄마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엄마,
엄마는 꼭 이겨내야 해.
나 엄마한테 할 말 많아.
꼭 다시 기운 차려서 나 수술하고 입원 끝내고 나오면 엄마한테 투정 부릴 수 있게 해 줘.
그동안 나한테 다 못준 사랑 오래오래 곁에서 다 주고 가야 해.
안 그럼 나 평생 엄마 원망할 거야.
엄마는 무조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엄마 힘내!!!
엄마의 긴긴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그리고 내내 평안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