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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30. 2019

두부를 대하는 자세

-손두부의 기억

가스 불 위에서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다. 하얀 두부가 된장 물을 머금고 탱탱 불어 둥둥 떠 있다. 두부 밑으로 호박과 버섯, 감자와 청양고추가 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두부뿐이다. 찌개에 들어있는 두부를 양껏 건져 밥그릇에 올리고 고추장을 적당히 넣어 밥과 비비면, 으깨진 두부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 뜨끈하고 매콤하고 부드럽다. 콩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도 좋아하는 두부 반찬은 각각 하나씩 꼽을 만큼 두부를 즐긴다. 두부조림과 두부 부침은 단골 메뉴고, 호박 고추장찌개에도 김치찌개에도 두부를 듬뿍 넣는다.


중학교 다닐 때쯤, 큰고모 댁에 간 적이 있다. 동갑내기와 한 살 아래 동생이 있는 작은고모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아이들이 이모 집에 간다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들을 따라 난 큰고모 집에를 처음 갔다. 고종사촌들이 이모를 만나는 것과 내가 고모를 만나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이 없어야 했지만, 난 그전까지는 큰고모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더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아도 최소한 그들과 내가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친밀함의 정도도 같게 느끼는 것이 맞다고 보았는데, 그 집에 처음 가는 것도, 그 먼 거리감도 이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남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렇게 처음 가본 큰고모의 집에서 큰고모는 손수 두부를 만들어 우리에게 먹였다. 고종사촌들은 이미 여러 번 그 맛을 보았던지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고 기다림을 즐겼던 것 같다. 나는 두부가 만들어지는 긴 시간 동안 그 주위를 내내 기웃거렸다. 불려놓은 콩을 맷돌에 갈고, 가마솥에 들어가 끓으면 간수가 부어지고 몽글몽글 덩어리가 올라오기까지 신기하면서도 기다림은 나를 지치게 했다. 처음 경험하는 긴 과정에 이러다가 밥을 먹을 수는 있는 것인지 답답증도 일었다. 그러고 나서도 그렇게 올라온 흰 덩어리들을 바가지로 꺼내 틀에 붓고 위에 무언가로 눌러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까지 무얼 하며 어디에 있었는지 희미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뛰놀며 방으로 마당으로 다니는 고종사촌들을 따라 지루함을 이겨보려 노력했던 기억밖에 없다.


드디어 받은 밥상. 고기도 아니고 특별한 생선도 아닌 두부가 메인이었다. 두부를 크게 툭툭 썰어 김치와 놓인 밥상.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의 멀건(맑은) 국물 위로 가지런히 얹어진 넓적한 두부. 그것들과 밥을 먹었다. 식단도 생각나지 않고 두부를 만드는 과정도 어지럽게 뒤죽박죽 길고 지루하게 남아있는, 큰고모 댁의 손두부 저녁 밥상이었다. 이상스럽던 경험에 어울리지 않게 별나게 맛있는 밥상의 두부는 별거 아니었던 두부를 특별한 음식이 되게 만들었다. 더불어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넓은 마당 한편을 온통 차지하며 두부를 만드는 기구들과 큰 가마솥에 장작불,  도시 외곽 작은 집에 살던 우리 형편을 생각하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규모임이 틀림없었다. 단지 가족을 먹이기 위해 하루 종일 시간을 내어 큰 수고를 벌이는 상황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엄마도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주시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귀한 음식을 만나는 것처럼 설렜고 엄마의 거칠 것 없는 움직임과 솜씨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엄마가 그 어려운 것을 뚝딱 만들어 상에 올리면 밥상의 품격을 올려놓은 것처럼 뿌듯하고 행복했다.


큰아이는 세 살 때까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말이 늦는다고 어른들은 걱정했다. 분명하게 말이 똑똑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를 흘리는 옹알이를 오래 했다. 남편은 귀여워서 비슷한 말을 더 만들어 아이에게 따라 하게 했다. 장난스러운 말, 놀리는 말, 화내는 말 등 아이가 하는 말을 같이 하며 아이의 말이 늦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달랐다. 아이의 말이 늦는 것을 아이에게 먹이는 음식 탓을 했다. 바로 두부였다. 아이가 잘 먹어 매끼 밥상에 올렸다. 으깨어 달걀에 풀어 부쳐주기도 했고 다진 고기와 섞어 완자를 만들기도 했다. 된 죽처럼 그것들을 함께 끓여 먹이기도 했고 부드럽게 볶아 먹이기도 했다. 값싼 두부였지만 영양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잘 먹는 것이 신통해서 자주, 그보다 더 많이 해주었다. 그 두부 때문에 말이 늦는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도 없었고, 떠도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마음은 언짢았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는 만 네 살이 지날 무렵부터 말을 똑 부러지게 하기 시작했다. 단어를 사용해 끊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문장으로 말을 해서 어느 집에서든 하나씩 있는 그 (언어) 천재를 우리도 만나는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민간에서 전해오는 말, 시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그 말도 쏙 들어가게 했고, 그로 인해 불편했던 나의 마음을 단번에 풀어주기도 했다. 어리석게도 두부를 그만 먹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날이 그날인 일상처럼 우리 집 밥상도 매일이 한결같다. 그래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두부를 향한 변함없는 입맛 덕분이다. 저녁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가서도 망설임 없이 두부는 장바구니로 가장 먼저 들어갔다. 이처럼 귀한 것을 이렇게 쉽게 살 수 있다니. 오늘도 우리 집 식탁은 두부로 풍성하다. 두부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부친 두부와 볶은 김치가 함께한 두부김치가 있다. 몇 가지를 돌려 먹어도 물리지 않는 두부 식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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