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을 터뜨리면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그 거품은 언젠가 터지고 만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한다.
최근 디지털자산 투자 손실로 올해 번 수익을 다 토해내고 나서야 바닥에 흥건한 거품 잔해들을 발견했다. 내 목표 금액을 넘게 달성했음에도 '포모(FOMO)' 때문에 현금화를 하지 못한 결과였다. 남들만큼 벌지 못 하는 게 두려워 목표 금액을 상향 조정한 채 재진입을 해버렸다. 10월 10일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테라 사태, FTX 사태를 능가하는 대규모 청산이 발생했고 올해 상승분을 다 반납했다. 내 잔액 역시 기존 목표 금액에서 훨씬 밀려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미국 주식은 먹을 만큼 먹었다고 판단해서 10월 초에 다 익절 했다는 것이다. 당시 매도한 코인베이스,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등도 여전히 그때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개미 투자자들은 이런 하락장에서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나는 그 답을 '채소'에서 찾았다. 계속되는 하락장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잠이 들지 못하던 새벽, 주섬주섬 일어나 화분에 콩을 심었다. 사놓고 미뤄두기만 하던 바질 씨앗도 뿌렸다. 아이처럼 손가락에 흙을 묻혀가며, 바닥에도 흘려가며 그렇게 어슴푸레한 새벽을 흘려보냈다. '언제 싹이 날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잠이 들었다. 어느 날에는 당근 윗부분을 잘라 수경재배를 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진 탓에 당근이 녹아버렸는데 그날에는 창가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일전 당근잎 무침이 별미였던 기억에 침이 고였다.
주식이나 디지털자산 거래 플랫폼 대신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을 들여다보는 게 하루의 낙이 됐다. '새 상품'이란 세 글자가 뜨면 후다닥 '채팅하기'를 누르는 순간은 호승심이 들었다. 버스로 20분 거리로 가지러 가는 길은 마냥 설렜다. 그렇게 열심히 발품을 팔아댔더니 10만 원에 아기 신발을 4켤레나 마련할 수 있었다. 새 상품 또는 새것에 준하는 상태의 제품들이라 퍽 마음에 들었다. 아이 신발장에 신발을 진열하면서 "물건을 저렴하게 사면 왜 이리 뿌듯한 걸까?"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집에서 15분 거리의 채소 도매 가게에서 그날의 채소를 사 오는 것도 낙이 됐다. 할인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고 1등급 유정란(대란) 30구를 9900원에 사 왔을 때는 주식 수익을 봤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채소가 상하면 안 되니 거의 매일 반찬을 만들고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이 죽으면 안 되니 물 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채소를 가까이 하니 일상이 좀 더 충만해진다. 중독 수준으로 매수/매도 버튼을 누르다 보니 도파민에 가득하던 뇌에 세로토닌이 다시 도는 기분이다.
사실 '채소'를 가까이한다고 해서 엄청 큰돈을 아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소비를 무작정 줄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푼돈이라도 모으려 노력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이 하락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완화해 준다. 자기 손으로 뭔가를 일궈낸다는 점에서 자존감도 회복된다.
얼마 전 당근 잎을 수확해 당근잎부침개를 해 먹었다. 남편도, 아이도 맛있게 먹었다. 며칠 전에는 바질 잎을 따서 바질페스토를 만든 김에 바질파스타도 만들었다. 아이가 그릇을 싹싹 비웠다. 이런 풍경 속에서 파란 숫자들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