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가 바라본, 양심의 끝에서 흔들리는 인간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을 천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가난했고 세상은 불공평했으며 정의는 늘 힘 있는 자의 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는 남들과 다르다. 위대한 인간이라면 법쯤은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 노파를 죽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자신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죄와 벌』은 살인 사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죄의식이 인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법정보다 냉혹한 법정이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를 단죄하지 않아도 그는 스스로를 단죄했습니다.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그의 내면은 고백의 무게로 조금씩 무너져 갔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건 ‘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결국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벌을 받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죄는 한순간이지만 양심은 평생을 따라오니까요.
라스콜리니코프의 진짜 죄는 살인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었고 세상을 이해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가장 모르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지점을 찌릅니다. 인간은 누구보다 자신을 심판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에게 관대합니다. 우리는 늘 옳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그 설득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불안함이죠.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서 죄의식은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감각입니다. 죄책감이 없는 인간은 괴물이 되고 죄책감이 지나친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죄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고.
오늘을 사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아도 도덕의 피로 속에서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SNS에 글 하나를 올리고도 ‘괜히 올렸나’ 하고 자책하죠. 타인을 미워하면서도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며 자신을 변호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또 한편으론 자신을 벌합니다. 죄의식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가장 일상적인 감각이 되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벌은 감옥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고통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의미를 끝없이 되묻는 고통 말이죠. 그 질문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일과 관계 속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도망칠수록 죄의식은 더 깊어집니다. 인간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와 벌』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벌하고, 바로 그 불완전함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듭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시베리아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구원이라 불렀지만 그 구원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자각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이 한 문장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인간은 완벽할 때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할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죠.
우리는 모두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스스로를 재판하며 살아갑니다. 완벽하려는 마음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다시 우리를 인간으로 되돌립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은 죄를 짓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 싶어서 버티는 존재라고.
『죄와 벌』의 세계에서 구원은 벌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끝까지 바라보는 용기이자, 벌을 견디며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의 힘입니다. 어쩌면 그게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진짜 구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