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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 현실이 버거울 때 붙잡는 마지막 환상

세르반테스가 남긴, 작은 광기의 의미

by 신세연

《돈키호테》는 읽을 때마다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소설입니다. 웃겨야 하는 장면에서 이상하게 울컥하고, 슬퍼야 하는 장면에서 오히려 뜬금없는 위엄이 느껴지죠. 저는 이 작품이 결국 이렇게 묻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이 버거울 때 우리는 어디로 도망치며 버티고 있는가.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매료된 끝에 갑자기 기사가 되겠다고 나선 노인입니다. 분명 현실 감각이 무너진 행동인데도, 마냥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광기 속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한 어떤 ‘이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가 그리는 건 헛꿈을 좇는 노인의 모험담이 아니라, 현실이 멀쩡한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 만큼 삭막해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허구를 붙잡으며 자신을 지키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늘 견딜 만한 것은 아니죠. 정의는 종종 패배하고, 비겁함이 승리하고, 노력은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돌린 사람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 편이 덜 아팠던 거죠. 그래서 그의 광기는 도피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자존심처럼 보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모두 스스로 주인공이 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삶의 구조가 기울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정직한 노력보다 요령이 먼저 통하고, 실력보다 관계가 중요한 순간들을 수없이 지나오죠. 그러면서 어느 순간, 체념이라는 기술을 배웁니다. 이걸 어른스러워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금씩 빛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도망칩니다. 누군가는 끝없는 체크리스트와 갓생이라는 이름의 삶에 몰두하며 불안을 덮고, 누군가는 SNS의 번쩍이는 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유지합니다. 돈키호테가 녹슨 세숫대야를 황금 투구라고 우겼던 것처럼, 우리 역시 좋아요 숫자나 사회적 타이틀로 속을 감추며 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약속 하나로 하루를 버팁니다. 그의 환상이 기사도였다면, 우리의 환상은 ‘나는 아직 괜찮다’라는 위태로운 말일지도요.


돈키호테를 보면서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미친 건 그 사람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제정신인 척하는 우리일까. 그는 풍차를 거대한 악당으로 착각했지만, 우리는 반대로 진짜 악당들을 보면서도 “나 하나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고 외면하죠. 전자가 과잉된 열정이라면, 후자는 과잉된 냉소입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현실이 주는 무게 앞에서 피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가 바보처럼 달려드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이상하게 부럽습니다. 조롱받고 실패하고 얻어맞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꿈에서 깨어 나와 현실을 인정한 순간, 오히려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다는 결말도 슬프지만 이해가 됩니다.


세르반테스는 아마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현실이 너무 무겁다면, 인간에게는 그 무게를 떠받칠 만큼의 ‘작은 광기’가 필요하다고.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종종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그 따뜻한 착각이라고요.


저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을 때, 괜히 조금 더 멋진 세계를 상상하는 일. 가능성 없는 일을 붙잡아보는 일.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인데도 내일은 뭔가 달라질 것 같다고 억지로 믿어보는 일. 남들이 보면 헛헛한 환상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그런 꿈들이 가장 힘겨운 순간들을 버티게 하더라고요.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끝없이 섬을 약속하며 여정을 이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에게 희망이라는 약속을 건네며 하루를 건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돈키호테를 비웃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한 바보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해 허구라는 짐을 짊어진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 삶에도 그런 허구가 한 조각쯤은 필요할지 모릅니다. 조금 촌스럽더라도, 조금 웃기더라도, 한 번 더 살아보게 만드는 그 얇고 따뜻한 환상 하나쯤은요.


그마저 사라져 버리는 순간, 우리는 진짜 현실에게 패배하게 될 테니까요.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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