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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재난 앞에서 일어나는 가장 평범한 기적

알베르 카뮈, 영웅이 아닌 성실한 사람들의 기록

by 신세연

《페스트》는 읽을 때마다 시간감이 사라지는 책입니다. 1947년에 쓰인 소설인데 오늘의 기록처럼 느껴지죠. 재난의 이름만 다를 뿐 그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감정선은 언제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카뮈가 던진 질문은 지금 읽어도 낡지 않습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


오랑이라는 도시는 하루아침에 봉쇄됩니다. 사람들은 고립되고 일상은 붕괴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흐려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극단의 순간에 인간의 본성은 더 선명해집니다. 처음엔 부정하고 곧 두려움에 질리고 누군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신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리외 같은 사람은 이유보다 행동을 택합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 이 소설은 그런 조용한 선함을 오래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재난이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기도 한다는 역설을 카뮈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페스트》를 읽을 때마다 인간의 위대함보다 인간의 평범함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카뮈가 말하고 싶은 건 초인적인 의지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몫을 해내는 작은 얼굴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없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분명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우리가 연대라고 부르는 단단한 말도 결국 이런 작은 움직임이 쌓여 만들어지죠.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떠오른 시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기울어지던 때. 일이 흔들리고 관계가 틀어지고 믿어왔던 가치들이 하나둘씩 벗겨지던 시기. 마치 보이지 않는 페스트가 삶을 조용히 물들이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나를 살린 건 극적인 도움이나 기적 같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 친구의 짧은 안부. 마감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앉았던 책상 앞의 루틴. 지나가던 동료가 건넨 따뜻한 커피 한 잔.


그 평범함들이 무너져가던 마음을 붙잡아줬습니다.

카뮈가 말한 연대는 이런 순간에 가까울 겁니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누군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온기. 내가 흔들릴 때 당신이 버티고 당신이 주저앉을 때 내가 일상을 이어가는 일. 서로의 성실함이 서로를 구원하는 순간들.


리외는 말합니다.

영웅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성실성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을 계속하는 태도입니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구하지 못해도 지금 눈앞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 이 소설의 핵심은 그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사실에 있습니다.


페스트는 병만이 아니라 절망과 공포와 무력감 같은 일상의 균열을 상징합니다.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작은 일을 계속하는 사람 덕분에 세계는 가까스로 유지됩니다.

《페스트》는 재난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작음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내는지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신을 탓하고 누군가는 체념하지만 리외와 타루 같은 사람들은 끝내 사람을 지키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지루할 만큼 꾸준한 선함이 저는 참 인간적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서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의 나약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소설의 마지막, 리외는 기록합니다. 페스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금도 어딘가 어두운 틈에서 잠들어 있다가 다시 인간을 깨우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등허리가 서늘해지는데 동시에 이상하게 위로를 받습니다. 절망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지만 그 절망을 건너온 인간의 의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으니까요.


저는 요즘 인간은 결국 서로를 살리는 존재라는 말이 조금씩 믿어집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도 무심코 건넨 한마디도 아주 작은 연대 하나도 생각보다 오래 남고 멀리 갑니다.

이런 작고 꾸준한 선함이 있다면 어떤 형태의 재난이 다시 와도 우리는 또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난처가 되어주고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주면서.

그게 우리가 여전히 사람을 믿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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