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못해서
유통기한 지난 과자와 차. 나오지 않는 볼펜.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올 때마다 나의 마지막 할 일은 엄마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먹을 거라고, 언젠가는 사용할 거라고 쌓아두고 쟁여두고는 잊어버린 것들. 그리고 멀리 사는 딸과 하나밖에 없는 손녀에게 주겠다고 챙겨둔 것들이다.
처음엔 쌓아 놓기만 하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쌓아두지 말고 제발 자주 정리하라고, 이렇게 쌓아둬서 도대체 나중에 뭐 하려고 하냐고 짜증을 냈다.
일 년에 한 번 오면서 다시 떠나는 마당에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속상하기도 하면서, 엄마가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셨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 자꾸 서운한 말을 하게 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날 새벽까지 엄마의 방을 정리했다. 속상하기도 하면서 문득 엄마의 삶이 보여 슬퍼졌다. 이런 환경을 그냥 두었냐고 오빠와 남동생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가까이에서 챙겨드리지도 못하면서 말만 하는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식 셋을 키우느라 늘 아끼며 사시느라 생긴 아끼는 습관.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에 좋은 건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쓰고 싶었던 마음이 담긴 습관. 그리고 자식 먼저 생각하는 마음.
엄마가 살아온 시절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해졌다. 이제는 내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엄마에게 제발 좀 버리고 살라고 할 때마다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낄 줄 모른다고 생각하셨을까. 널 키우느라 그랬다, 네가 뭘 아냐고 하셨을까.
정리를 하고 방바닥을 한 번 쓸면서 엄마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자식들이 장성하면 아들보다는 딸과 살갑게 지낸다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해외에 나가서 살면서는 제 필요할 때만 한국에 와서는 바쁘게 돌아다니다니기만 하고 집에서는 잠만 자니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그 허전함을 이렇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것으로 채워오신 건 아닐까.
"너도 니 딸 키워봐라."
나도 나중에 엄마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투닥투닥 싸우고, 사춘기 발동을 걸면서도 엄마가 제일 좋다는 지금의 내 딸도 나중에는 일 년에 몇 번 못 보는 관계가 될까? 그건 많이 서운할 것 같다. 나는 내리사랑으로 만족하는 엄마이고 싶지는 않다.
매년 엄마의 나이 들어감이 느껴진다. 친구분들 만나러 가는 시간보다 보건소에서 치료받으시는 시간이 많고, 걸어 다니시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엄마. 몇 년 전까지도 일 년에 세 달씩은 호치민에서 함께 살면서 손녀를 업고 뛰어다니시고, 베트남 말도 모르시면서 매일 새벽 운동 모임에 나가서는 베트남 분들과 친하게 지내시던 놀라운 사교력과 체력을 가진 분이었는데, 그새 많이 달라지셨다. 엄마의 방에서도 느껴지는 엄마의 나이 듦이 이번에는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매년 한국 갈 때마다 엄마의 휴대폰을 새로 정리해 드리는 것도 내 몫이었다. "이거 문자 어떻게 지우니?", "차단한 건 어떻게 풀어야 하니?", "사진은 어떻게 바꾸니?", "이건 어떻게 보내야 하니?"... 올해는 6학년 손녀가 외할머니의 전화기 배경화면을 바꿔드리고, 카톡 프로필 사진도 바꿔드렸다. 그리고 뜨개질을 배워보고 싶다는 아이는 이번에 유튜브 선생 대신이 한 때 뜨개질 전문가였던 외할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우겠다고 했다.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자기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신나게 가르쳐주시는 외할머니가 서운해하실까 봐 한 시간 동안 힘겹게 뜨개질을 배웠다. 풀었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한 한 시간 동안 아이가 뜬 뜨개질은 겨우 16코 한 줄이었으니 얼마나 그 시간이 힘들었을까. 엄마에게 투덜거리는 나보다, 힘들어도 한 시간을 버티는 손녀가 낫다.
한국을 떠나는 길에야 좀 더 잘해드릴 걸 하는 마음이 든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건강하시기를, 아니 회복돼서 예전처럼 건강해지시길.
속상함과 화난 마음이 뒤엉켜 엄마 앞에서는 하지 못한 말.
무뚝뚝한 딸이라서 죄송하다고.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쌓아 놓고 살지는 말자고. 내년에도 그러면 같이 상담받으러 가자고.
아니면 내가 정리전문가 자격증이라도 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