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하프마라톤 까지는 4 주 남았고, 뉴욕 마라톤 까지는 10 주 정도 남은 상황이다. 20km를 달려야 하는 날이다. 아침에 비가 올 확률 50%이라고 날씨를 예보한다. 그렇다면, 비가 오지 않은 확률도 50% 이기에, 달리기가 끝날 때쯤 비가 오길 바라는 기대를 하면서 아직은 비가 오기 전 구름이 잔뜩 물고 있는 어두운 하늘을 위로하고 꾸물 거리며 나선다.
집을 나올 때 보다 밝아진 아침 공원에 도착하고 보니 아주 습한 아침이다. '긴 바지 괜히 입고 나왔어. 짧은 바지를 하나 챙겨 올걸...' 후회가 밀려온다. 더운 날 달릴 때 온도보다 10도 (화씨) 높게 생각을 하고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어두웠던 아침에 생각보다 선선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긴바지를 입고 나와 버렸다. 다음에 더 좋은 선택을 하면 되지...
평소처럼 나이키 앱을 켜서 20 km을 달리려는데 몇 번이나 다운로드가 되지 않는다. '아, 비가 오기 전에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급한데, 왜 이건 안 되는 거야?' 거리는 비슷할 테니 하프 마라톤 레이스 가이드 런을 켠다. 20km 나 21.1km 뭐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갈 길이 멀다. 일단 달리기를 시작했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직 20km가 내 앞에 있다. 천천히 나의 페이스를 찾아 달리기 시작한다. 어김없이 오르막길이 나온다. 매주 지나가지만 매주 쉽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동안 만나는 오르막길 매번 지나 가지만 쉬어지지 않는다 때론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올라간다. 올라가야만 지나가 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한발 한 발을 내디뎌 나아가는 데 집중하는 것 이 나의 노하우 라면 노하우 겠다. 오르막길을 따라 나오는 내리막길의 페이스가 더 중요하다. 너무 빨리 달려 나가질 않기, 겨우 1/4 거리를 달려온 거리다. 호흡을 가다듬고 페이스를 유지해서 10km를 달렸다.
10km 달리고 나니 몸도 마음도 풀려서 처음 달릴 때 보다 호흡이 안정적이다. 15 km을 달려 나가는데 굵은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달리기가 끝나고 내려주기를 기도 했는데, 아... 아쉽다. 빗방울의 굵기가 예사롭지 않다. 나무에 갈려진 구간을 달리고 있어서, 비가 호수 물에 떨어지는 소리에 비가 생각보다 많이 오는 걸 알았다. 아직 6km 나 남았는데... 이제야 이해가 갔다. 왜 20km 런이 다운로드되지 않고 하프마라톤 레이스 런을 달리게 되었는지, 만약 20km 런이었다면,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긴 리커버리 런은 언제라도 멈출 수 있기에...
혼자 달리는 상황임에도, 하프마라톤 레이스를 시작했기에, 연습도 실전처럼 한다. 만약 실전 레이스 상황이었다면 비가 온다고 쉬지 않을 테고, 레이스를 그만두지도 않을 테니 그냥 준비한 데로 달린다. 비가 점점 세게 내려서 아이패드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절었다. 빗물로 가득한 운동화가 질퍽질퍽한 소리를 내며 무겁게 나아간다. 그 순간 나를 지나가는 러닝 그룹들도 비를 맞으며 달려간다. 앞에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러닝 그룹이 달려가고 있다. 선두를 따라 12 명정도 줄을 지어 달려간다. 그들과 거리를 좁혀 달려간다. 비는 점점 세게 오는데 앞에서 달리고 있던 러닝 팩이 없었더라면, 정말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달려서 들어왔다. 21.10 km 2시간 13초 6'18 페이스
비가 오는 바람에 정신없이 달려들어 하프 마라톤 거리를 달렸다. 첫 프린스턴 하프마라톤을 준비하면 달렸던 날들과 확연히 달랐지만, 오늘도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데로 오늘을 달렸다.
'비가 와도 달린다.'라는 말은 아무리 달려도 너무 어렵다. '달리고 있는데 비가 와서 열심히 끝까지 달렸다.'였다.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다. 앞으로 달려갈 거리가 달려온 거리보다 짧았기에 돌아갈 수 없었고, 걷는 것보다 달리는 게 세차게 내리는 비를 덜 맞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비가 와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비가 정신없이 내릴 때는 비를 피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때도 있다. 준비 없이 내리는 비를 온통 맞고 있으면 건강에 안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곳이나, 우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비비어 보거나,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때, 내리는 비를 맞으면 달려 나갈 수 있는 때를 살핀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기보단, 그 비 속에서도 '춤'을 추며 행복을 찾을 줄 아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Life isn't about waiting for the storm to pass. It's about learning how to dance in the rain.”
같은 비를 맞아도 그 비의 무개는 같을 수 없고 다른 비를 맞아도 같이 비를 함께했다면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같이 거대한 폭풍우를 만나고 그것을 해쳐나가는 방법은 제각기 인 것은 우린 각자 다른 배를 타고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를 정통으로 맞아본 사람은 섣불리 비 속에서도 춤을 추며 행복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을 누구 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살고 싶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인데 멀리서 보고 멋있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론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의 깊이와 넓이는 너무나도 다양하기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너무나도 위협적인 말일 수도 있겠다.. 지금 제일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사람들,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힘이 들고 아픈지 않은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잠시 숨이 멎는 것 같다.
지금 비를 맞고 있다면, 비가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해가 쨍쨍한데,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기다려 준다. 비를 닦을 수건이 필요한지, 비를 피할 우산이 필요한지, 폭우를 맞설 텐트가 필요한지, 갈아입을 새 옷이 필요한지, 감기에 걸려 약이 필요한지 아직 모른다. 때론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이 최선의 위로 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 보고 필요한 것을 준비해 준다. 같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는 날이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최선의 선택이다. 무기력해지라는 소리가 아니라, 힘과 방향을 조절하라는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선택이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도 전략적인 선택인 순간들이 있다. 언제 어떤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매 순간 전속력으로 힘을 주고 나아가면서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힘을 유연하게 조절해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잘 달리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늘내일하고 끝낼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 오는 아침, 오늘도 달리고 시작한다. 힘을 잔뜩 주고 시작할 뻔했는데, 오늘을 오늘대로 마주 하기로 한다. 8월 트레이닝하며 달려온 거리 90.1km,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큰일이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