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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Feb 02. 2021

성 정체성의 확장과 커밍아웃, 21세기를 달구다

성별 구분의 이분법을 탈피하고 LGBT의 권리를 보호하는 유럽 국가들

우리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익숙하다. 복잡하게 실타래가 얽힌 문제이분법의 시각으로 분석하면 깔끔하게 이해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교양지식 팟캐스트로 출발하여 2015년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다. 저자는 특유의 이분법 그림을 활용하여 정치,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철학, 과학, 예술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러나 이분법 프리즘은 양날의 검과 같다. 명쾌한 설명과 이해는 가능하지만, 지나친 도식화와 은연중에 나타나는 서열화로 인해 내편과 상대편, 옳고 그름의 편 가르기로 변질되곤 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정작 우리가 사는 인생이 둘 중의 하나로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고집한다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중간영역을 무시하거나 소멸시키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다. 남성과 여성, 미혼과 기혼으로 이분화된 분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에서는 삶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이분법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적인 도구가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공동체 모습이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일상화된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보리스 존스 영국 총리와 여자 친구 캐리 사이몬즈


성인 남녀가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 진작부터 고민해 온 유럽에서는 결혼 여부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2번의 이혼 후 동거녀와 함께 관저에 살고 있는 보리스 존스 영국 총리가 상징하듯이, 이제 대다수 유러피언들은 결혼과 동거에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독신, 기혼, 이혼, 동거, 동성결혼 등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고, 자녀 양육 시 국가가 지원하는 복지혜택은 어느 경우에든 아무런 차별 없이 제공된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의 섭리 같은 이분법적 분류도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페미니즘으로 상징되는 여성인권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면, 21세기에는 성 정체성을 확장하고 성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 속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낯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2000년 9월 26일 한국 연예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코믹한 연기와 왕성한 리포터 활동으로 인기를 끌던 홍석천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선언한 것이다. 동성애가 공론화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커밍아웃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한국 사회에 홍석천이 던진 파장은 제법 컸다. 커밍아웃 이후 모든 방송활동을 접어야 했던 홍석천은 2000년대 후반에서야 연예계에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홍석천은 게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피하기보다 오히려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맞서 싸웠다. "이성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동성을 사랑하느냐"를 따지기에 앞서, 정작 중요한 사실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냐"라는 것임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입증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연예인으로서, 사업가로서 홍석천이 보여 인간적인 매력은 커밍아웃 이후의 시련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세계적으로는 1997년 4월 미국의 유명 배우이자 진행자인 엘런 드제너러스가 커밍아웃을 한 것이 최초 사례다. 당시 자신의 이름을 딴 시트콤 <엘런>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는데, 이는 미국의 TV 역사상 프라임타임에 동성애 캐릭터가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로 엘런은 에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고, 그녀의 용기에 <타임>을 비롯한 많은 매체들이 찬사를 보냈다.


1997년 4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엘런 드제너러스의 커밍아웃


힘겹게 물꼬가 터지자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연예계 스타들의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커밍아웃이 속속 이루어졌다. 2013년 조디 포스터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커밍아웃을 하며 여성 사진작가와 연인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앤젤리나 졸리와 메간 폭스, 레이디 가가는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다. 2010년 SBS 주말드라마로 방영된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대가족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리면서 지상파 프로그램으로는 보기 드물게 동성애 코드를 담아 화제가 되었다. 믿고 보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기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힘들게 고백하며 폭풍 오열하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따뜻하게 안으며 함께 눈물 흘리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우리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지 너무나 잘 아는 부모이기에 더 뜨겁게 안아주었을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힘든 시간이 지난 후, 부모는 아들이 데리고 온 동성 연인을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TV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인 아들의 동성애 고백 신


여전히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수현 작가는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는 최대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아들(송창의)과 연인(이상우)을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남성 배우로 캐스팅하여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완화하고자 했다. 두 사람의 애틋한 관계는 눈빛과 포옹 정도로 표현하며 진지하면서도 순수하게 묘사했다.    


2018년 10월에 개봉하여 전설적인 록그룹 퀸 열풍을 다시 불러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는 웰메이드 음악영화이자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의 동성애 고뇌가 담긴 애잔한 작품이다.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서서히 찾아가는 힘든 여정 속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 친구의 애정 어린 위로 덕분에 다시 일어선다. 용기 있는 동성애자이자 위대한 뮤지션으로 무대에서 온 몸을 불사르는 그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벅찬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성 정체성을 확장하여 성 소수자들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바꾸려는 노력과 제도적으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치들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정치인이나 엔터테인먼트 스타들은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공인이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화제를 일으켰지만,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억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완강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는 LGBT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보수적인 종교계와 정치권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퇴폐적인 죄악이라고 비난한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다.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성 정체성의 '다름'에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질병'으로 간주하거나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     


하지만 속도와 효율보다 깊이와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 국가들은 성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지속해왔다. 기본적으로 유럽은 생물학적 성(sex)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독일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남성, 여성과 함께 '간성'(intersex)을 두거나, 아예 성별 구분을 삭제했다. 성(gender) 정체성이 다른 성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도 시행하고 있다.


세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커플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연예인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선언한 2000년에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1993년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는 '평등법'을 제정한 데 이어, 동성애자 간의 결혼과 자녀 양육에 대해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암스테르담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Gay Pride Parade>가 열린다. 개인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 자유로움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삶의 풍요로움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상과 비정상으로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21세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성 정체성의 확장과 커밍아웃 이슈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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