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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외선생 홍언니 Oct 17. 2019

열정과 결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처음 가르친다는 것. 그것은 가볍게 시작할 것이 아니었다.

단체는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친구들과 단순히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던 단체 '사이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과연 그 활동은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곤 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으로 하나씩 홈페이지를 만들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하고. 우리에게 갖는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을 어디서 어떻게 모아 오는 가?' 였다. 사실 방법이 없었다. 인지도도 없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라곤 0에 수렴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각각의 멘토들이 다른 전공을 갖고 있다고 한들, 우리의 학력이 전체적으로 결코 높지 않았기에 학부모, 혹은 학생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기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어떠한 방법이라도 홍보를 진행해야 했고, 그 방법으로 우리가 내세운 것은 결국 부탁하기였다. 각 페이지에 메세지를 보내,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의도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업로드를 부탁할 수 있는지, 연락을 돌렸다. 대부분의 페이지에서는 무시, 거절, 그리고 금전을 요구하였다. 사실 당연한 거였다. 그들도 그 페이지를 운영하는데, 공짜로 운영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우리의 편을 들어주는 몇몇개의 페이지가 있었다. 운이 좋게 좋아요 10만개 정도를 가진 몇 개의 페이지에서 우리의 게시물을 업로드 해 주었고, 우리는 그를 기반으로 점점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놀라웠다. 페이지 마케팅이라는게 이렇게 대단할 줄은.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고 고생했던 것과 다르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원서가 채워지는 것을 보며 희열과,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과연 우리가 이 학생들을 무슨 기준으로 선발할 수 있을까."


입학사정관의 마음으로, 최소한의 서류를 최대한 진지하게 검토했다.


우리가 제각각 지도할 수 있는 멘티의 최대 수는 5명 정도였다. 그도 당연한 것이 우리는 멘토 이전에 대학생이고, 아르바이트 생이고, 또 자신만의 활동들도 진행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우린 총 40여명의 멘티를 선발하여, 각자 지도를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지원자의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정확한 수치까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1천명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학생들이 문의하고, 또 요청한 서류들을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발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사실 결과는 간단했다. 결국 내가 지도할 학생 뽑는게 정답 아닌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발을 하고, 만약 그 학생이 다른 멘토와 겹친다면, 각자의 의논을 통해 이를 나누고, 추가로 선발하거나, 간혹 필요하다면 전화면담을 거치자고도 하였다.

당시 내가 선발했던 학생들. 지금에서 보면 참 바보같이 뽑았다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곤 한다. 무능한 멘토였던 내게 그래도 열심히 받으려고 노력했...을거라고 믿고 싶다. 내가 당시 받았던 학생은 아직도 기억나는 다섯명의 학생이다.

정확하게 애들 희망 전공이 무엇인지 각자 기억나지는 않지만, 간호학, 정치외교학, 수의학, 의생명과학, 고분자공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이었다. 이 중, 두 명은 사전에 내게 많은 문의를 주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이 열정들을 높게 사 선발하게 되었다.

- 절대로 선발에 예외를 두어서 안된단걸 깨달은 부분이었다.

당시 나는 이외에도 약 5명의 후보군을 더 놓고, 모두에게 전화통화를 함으로서,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신청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통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 나머지 셋을 선발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입학사정관들이 서류를 어떤 기준으로 보는지, 또 어떤 서류가 성실한 서류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내 멘토링에서의 가장 큰 모토는 '친근함'이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 중에 서로에게 벽이 있으면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해소하는 누구보다 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의 반응은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내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되기를 바랬고, 멘티들과의 단톡, 그리고 각자 전화통화를 최소 30분 이상씩 지도를 하며 학생의 성향과, 학교 생활의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자기소개서와 입시 설계를 시작했다. 다소 어눌한 부분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과정을 거쳤고, 대학을 설계해주면서 학생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랬다.

바보같지만,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당시 수학 성적이 낮았던 학생이 있어, 때마침 서울에 위치하였기에 친구 한 명에게 부탁하였다. 친구는 내 부탁이니 흔쾌히 무료로 수학 과외를 하겠다고 해 주었고, 수학 과외를 진행했다. 하지만,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 학생이 나한테는 수학숙제 때문에 자기소개서 숙제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고, 친구에게는 자기소개서 숙제가 많아 수학 숙제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그냥 안 한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와서 화풀이 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당시 서울에 있는 학생들은 나한테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인 작은 돈, 한달에 5-60만원 남짓으로 식사와, 나아가 참고서 구매에도 도움을 주곤 했으니까.

이런 상황에 화가 터진 것은 원서접수 과정에서였다. 당시 자기소개서 입력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한 상황에 학생 하나가 너무 큰 여유를 부렸다. 학교에서 마무리 하고 집에 가라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집에 가더니, 씻고 온다며 마감 10분 전에서야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속 터져 가는데 이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어찌저찌 마무리를 하고 하루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이 학생을 계속 데리고 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인가에 대한 회의감.

결과는, 아니었다. 그 학생을 방출하기로 하였고, 멘토들에게 상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충분한 고민이 이루어졌고, 이 학생을 더 이상 지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 제자 중 하나를 스스로 잘라 내었다.

그 와중에 다른 한 명은 너무 일방적인 통보라며 저 학생 편을 들었고, 결국 떨어져 나갔다. 뭐. 어쩔 수 없지. 자신만의 생각과 이유가 있었을 테니.


사실 저 학생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온라인 멘토링 기반이었지만, 대학 강의실을 빌려 우리가 한땀한땀 준비해 강연을 몇 번 진행했기에 그 사이에서 멘티들은 서로 만남이 있었을 거고, 추가로 우리와도 만남을 가졌으니까. 그 사이에서 친해진 사람들끼리 만나 새로운 단체를 만든 것 같았다. 결과는 ...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만. 그 외에도 우리는 지방 학생들을 위해 부산 카페를 빌려 경상권의 학생을 지도해 주겠다며 참여하고, 우리끼리 연합 멘토링도 진행하는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쳐 학생들을 만나고, 지도하는데 힘썼다. 물론 그 어떤 지원비도 없었고, 100% 우리의 사비로 진행되었다. 또 오면 음료 한 잔, 밥 한끼 사주는 것. 우리의 부담이었지만, 학생들에겐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여하튼 그렇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남은 학생들 중 가장 미련이 남는 학생이 있다.

수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나는 올바른 선생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지만, 내가 애정하는 학생 중 하나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바르고, 밝으며, 매사에 열정적인 이 학생을 수의대에 꼭 보내고 싶었지만, 결과는 수의대 5개를 떨어지고 지방 거점 국립대의 일반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이 학생에게 몇 년간 사과를 해 왔다. 내가 무능한 탓이고, 너의 노력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게 해 준 스스로가 원망스럽다고. 그 때마다 이 학생은 나한테 자신은 스스로 안될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다만, 내가 도와준 상황에 후회없이 원서를 썼기에 수의대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가끔 연락을 하는 과정 중 올해가 되어서야, 하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나한테 유학간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긴 한데, 최근 뭐 하버드에서 찍은 사진들이 몇개 올라오는 걸 보니 그쪽으로 갔으려나 싶기도 하다. 여하튼 정말 대단한 친구다.


사이다 멘토링 이외에도 나는 별개로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입시 커뮤니티인 수만휘, 카카오톡 오픈채팅 등을 통해 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 때 당시에 저는 어차피 공무원 시험 준비할 거니까 집 앞에 있는 국립대만 가게 해주세요. 헀던 학생이 있었다. 비록 나를 지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신선한 이미지였고, 결국 그 친구는 집 앞 국립대에 진학했다. 여담이지만, 이미 공무원시험 합격해서 공무원 하고 있다. 나보다 더 나은 것 같다.


마음이 아픈 친구도 있었고, 나를 거쳐간 학생은 이후에도 설명하겠지만 수백, 아니 수천명은 될 것이다. 그 학생들에게 나는 좋은 기억으로, 하나의 선생님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 제 글은 일기를 저장하는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그림이 다소 적을 수 있습니다. 이에 읽는데 불편하실 수 있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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