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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Sep 17. 2024

너만의 것을 봐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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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중순의 토요일 아침, 나는 아침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눈을 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제시간보다 미리 창동역에 나가서 다연 누나를 기다렸다. 아홉 시가 조금 못되어 도착한 다연 누나는 역사 매점에서 파랗고 하얀 파도 무늬가 그려진 이온 음료 두 캔을 사서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일찍 왔네. 아침은 먹고 나온 거야?”

 “응. 할머니가 매일 여덟 시 전에 차려 주셔.”

 “할머니 힘드시겠네. 아침 정도는 그냥 간단히 먹는 집도 많은데.”

 할머니가 고생하실까 봐 걱정하는 다연 누나의 마음이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고생하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누나는 왜 이리 어른스러운 걸까. 나도 고등학생이 된다면 저렇게 철든 생각을 하게 될까.

 “누나는 보면 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거 같다.”

 “너보단 어른이지.”

 다연 누나가 웃으며 말했다. 인천행 1호선 열차를 타자마자, 때마침 출입문 쪽 좌석이 비어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갈 수 있었다. 부평역에서 인천지하철로 갈아타기까지 앞으로 최소한 한 시간 반 이상은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슨 이야길 나눠야 할까.

 “너 매일 그림 그리는 거 연습한다면서 나한테는 한 번도 안 보여주더라.”

 “하율이 빼고는 원래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데?”

 “그래도 나는 포함시켜야지. 태블릿 빌려준 것도 난데.”

 “그러네.”

 미국으로 떠난 아빠가 남기고 간 물건들 중엔 읽을 만한 책들이 제법 있었다. 그중에는 아빠가 이십 대 때 구입한 『슬램덩크』나 『드래곤볼』시리즈의 일부도 남아 있었다. 열 살 때부터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가 되면 곧장 집으로 가서, 아빠가 남기고 간 그 옛날 만화책들을 읽었다. 주변 친구들이 핸드폰으로 동영상이나 웹툰을 볼 때, 핸드폰이 없는 나는 그때 막 네 살이 지나 까불거리는 하율이와 함께 반지하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채 색 바랜 만화책의 페이지들을 넘겨 보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친구들은 모두 학원에 가고 무료하게 남아도는 한낮의 시간들, 나는 공책에 만화책의 주인공들을 그대로 따라서 그려보기 시작했다.

 “오, 잘 그리는데? 언제부터 웹툰 작가가 꿈이 된 거야?”

 “그냥 아빠 만화책들 따라서 그리다가 직접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어서. 첨엔 공책에 만화를 그려봤는데, 하율이한테 말풍선 읽어주면서 보여주니까 되게 좋아하더라구.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린 거 같애. 지금은 누나가 빌려준 태블릿에 그리지만.”

 “역시 독자 반응과 연습이 중요하구나. 오 학년치고 제법이야. 나중에 나랑 하율이도 만화에 등장시켜줘 봐. 재밌겠다.”

 “에?”

 그런 이야길 주고받다 보니 나는 문득 다연 누나의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른 나이에 청소년 봉사단에도 참여하고,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와 어린 하율이를 돌봐주는 모습에서 다연 누나에겐 뭔가 누군가를 돕는 직업도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장래희망이 뭐야?”

 “나? 글쎄.”

 누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꿈을 정하지 못한 것일까.  

 “아직 없어?”

 “아니, 없다기보다는 맨날 바뀌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꾸준한 네가 나보다 낫네.”

 꿈을 일찍 정한 나로서는 왠지 누나를 격려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원래 어릴 때 꿈은 자주 바뀌는 거래.”

 “누가 그러는데?”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가 그런 얘길 하셔?”

 “내가 만화 그리는 웹툰 작가 한다니까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 만화가는 배곯는 직업이라고. 어릴 때 꿈은 나중에 바뀔 거라나 뭐라나.”

 내 말을 들은 다연 누나는 맞은편 창 너머로 스쳐가는 도심 풍경을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내가 한 말을 곱씹는 듯했다.

 “사실 작년부터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거야.”

 “작가?”

 “그래. 어찌 보면 웹툰 작가가 되고 싶은 너랑도 비슷하네. 근데 난 그림이 아니라 글로 이야기를 쓰고 싶어. 동화나 소설 같은 거.”

 “특별한 이유가 있어?”

 “흠. 예전부터 편지든 뭐든 쓰는 걸 좋아하긴 했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한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근데 막상 이야기를 쓰려고 보니 내 경험이나 상상력이 너무 부족하더라. 그래서 이것저것 일단 경험해 보려고 작년에 몰래 산타 봉사단도 들어간 거야.”

 “아, 그랬구나. 그 계기가 됐다는 영화가 뭔데?”

 “너 혹시 『매직 오브 벨 아일』이란 영화 봤니? 작년에 나온 건데.”

 그러면서 다연 누나는 전철에서의 무료한 시간도 달랠 겸 그 영화의 줄거리를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미국 플로리다주 벨 아일이란 바닷가 도시에 휠체어를 탄 나이 든 작가가 잠시 머물게 돼. 그의 이름은 몬티야. 그는 한때 유명한 서부극 소설 작가였는데, 아내의 죽음 이후론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채 술독에 빠져 살았어. 그의 착한 조카가 몬티의 의욕과 영감을 북돋게 하고자 그 해변 마을의 거처를 얻어준 셈이랄까. 그러나 몬티는 조카의 마음도 몰라준 채 타자기를 밀어두고서, 휠체어에 앉아 계속 술병만을 찾는 몰락한 작가의 모습을 이어갔지.

 몬티가 머물게 된 곳의 옆집엔 이혼을 준비 중인 중년의 여인과 그녀의 딸 세 명이 아빠와 떨어져 살고 있었어. 그중 둘째 딸인 아홉 살 핀은 외계인이 나오는 소설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어. 핀은 몬티가 한때 유명한 서부극 소설 작가였음을 다른 이웃을 통해 알게 된 후, 그의 소설을 헌책방에서 구입하기도 하고 그에게 찾아가 이야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그러나 이미 스스로 글쓰기를 은퇴했다고 생각하는 몬티는 시큰둥하기만 했지. 하지만 곧 핀의 순수한 열정을 마주하고서 점차 핀에게 마음을 열게 돼. 그가 처음으로 핀에게 이야기 짓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한 말은 다음과 같았어.

 “상상력이지. 너만의 것을 봐야 돼. 안 보이는 걸 찾는 걸 멈추면 안 된단다.”

 아직 어린 핀은 몬티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 오히려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않고 유치한 코끼리 동화 따위나 쓴다며 몬티에게 화를 냈지. 그러나 몬티는 핀의 어린 동생과 그들의 이혼한 엄마를 위해, 핀이 유치하다고 여기는 그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 선물해 주면서 점차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된 걸.

 그런 몬티의 모습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핀에게 그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어.

 “이십 대 때 나는 유망한 야구선수였지. 스물다섯 번째 생일엔 카디널스 팀에서 내게 선발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어.”

 핀은 휠체어에 앉은 이 할아버지 소설가가 또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바라보았어.

 “그 좋은 소식을 들려주러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였어. 보다시피 그때부터 휠체어 신세가 됐단다.”

 하지만 그때, 지금은 곁에 없는 죽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처음엔 아내의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서부극의 주인공을 만나 이야기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몬티는 핀에게 말했어. 하지만 육 년 전 아내가 죽자, 이번이야말로 다시 자신의 모든 인생의 문이 막혀버렸다고.   

 “그런데, 그런 어느 날 아홉 살 핀이라는 소녀가 내게 찾아와 내 다리를 일으켜 줬어.”

 핀은 물었어. 내가 어떻게 몬티 할아버지의 다리를 일으켜 세웠죠? 하고. 그 말에 몬티는 이렇게 말하지.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렇게 날 믿어줬으니까.”          


 다연 누나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몬티의 인생과, 글쓰기에 순수한 열정을 보이는 아홉 살 핀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치 자신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하나의 문이 닫힌 채 살았다가, 영화를 본 이후 다른 문이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고. 그 영화처럼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그래서 그때부터 작가의 꿈을 갖게 됐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게 나한텐 새롭게 열린 문처럼 보였어. 핀의 믿음이 몬티를 다시 글 쓰게 만들었다는 말에도 뭔가 큰 울림을 얻었고.”

 “그럼 지금 누나는 글 쓰는 거 연습하고 있어?”

 “아직 잘 되지는 않지만, 조금씩 뭔가 쓰고 있긴 해.”

 “그렇구나.”

 이때 나는 다연 누나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누나가 꼭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거라고 믿어. 그 영화 속 몬티처럼.”

 다연 누나가 그런 날 보며 웃었다.

 “고마워. 너도 꼭 유명한 웹툰 작가가 될 거야.”

 “땡큐.”

 인천행 1호선 열차는 어느덧 용산역을 지나 한강철교를 따라 강을 건너고 있었다. 모처럼 보는 한강의 물결이 오월 햇살을 맞아 반짝이며 출렁였다. 햇살은 차창을 따라 나란히 앉은 다연 누나와 내게도 닿았다. 따뜻한 눈부심이었다.

 내 마음도 한강의 물결처럼 잔잔히 출렁였을까. 용산역을 지나 노량진역으로 열차가 덜컹덜컹 다리를 건너갈 때, 나 역시 왠지 그동안의 어두운 문을 닫고 새롭게 반짝이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마주 보며 잠시 말이 없어진 다연 누나의 옆얼굴을 나는 슬며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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