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피로
역시나 오늘도 상사는 내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제 뭐 하고 있어?'라고 묻는다. 기안을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독촉하자 미칠 것 같은데 티 안 내고 말했다. 서류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하니 '과장이 관심 갖고 있는 주제니까 주무관이랑 협의하면서 해'라고 굳이 잔소리를 한다. 난 잔소리가 싫다. 알아서 하는 타입이어서 자랄 때도 부모에게 터치 안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런 지시에 거부반응이 나올 만큼 싫다. 내가 언제 상위랑 협의 안 하고 진행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가스라이팅에 오늘도 난 말라갔다.
어제 회식땐 실원들 모두 내가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걸 알고 있을 정도로 갈등이 격화된 상태다.
'과장님(나) 원래 그런 스타일 아닌데 요새 좀 화가 난 거 같던데'라고 동료가 말했고 그의 말마따나 나는 매 순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예전부터 화는 많았지만 과거엔 물건을 소리 나게 팍 내려놓는 정도였다면 요새는 당사자와 맞다이로 싸운다.
동료들은 티를 안 내고 나는 부득불 티를 낸다.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틈만 나면 죄송하다 읊조리는 부하에겐 상냥하게 대하면서 옳은 말을 하고 즉각 반박하는 내게는 시비조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태도 문제라고 할 테지만 그가 뭔데 날 판단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가 제일 싫어하는 태돈데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평화롭고 나는 항상 갈등과 번민에 휩싸여있다.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태도가 죄송한다는 말로 해결되는 조직이라면 애초부터 나는 떠났어야 했다.
그건 까슬한 니트를 입은듯한 불편감이었다. 어느 날 밖에서 혼밥을 하는데 옆테이블에선 엔지니어링 전문용어를 서너 명의 남자들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직장인이 아니라면 (지금 혼밥을 하는 난) 완벽한 소외감을 느꼈겠다'라고 생각하며 사실 그들과 같은 회사원이라는 것에 마음속 안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데' 마음속으로 소리 지르고 있다.
회사에서 8시간을 있다 보면 아파진다. 두통이나 근골격계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들은 미지의 세계로 날 데려간다. 안정적으로 살다가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당장 떨치고 나와야 하는 건데 또 월급뽕을 받고 다니고 있다. 무능한 상사와 배울 점이 없는 사람들. 매일매일 끓는 물에 데워지고 있다.
본가 가족은 화기애애하게 외식을 하는 내용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동생들이 잘 맞춰주기 때문일 테지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어머니가 잊을 때쯤 먹을 걸 싸갖고 와주긴 하지만 나는 자주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근데 누군가 있어도 달라졌을 것 같진 않다. 누군가 옆에 있는 순간에도 나는 인간 본연의 혼자라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민감한 감각들을 가지고 있는 걸 축복이라 생각하며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더 적확히 느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요샌 기다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세워둔 마지노선은 한 달이다. 하루 24시간 30일을 참을 수 있다면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의 고리들로 완전히 회사에서 방전되어 돌아오니 식욕도 없어 사과 한 개 먹고 요가를 갔다. 요가는 다리를 앞뒤로 찢는 동작을 했고 마치 핫요가를 하는 듯이 땀이 비 오듯 났다. 분명히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음악이 음소거된 듯 안 들렸다. 베일듯한 첫 키스도 그랬다. 나는 너무 피로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보는 차트 같은 건 이제 습관이 들어 괜찮은데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다. 이기는 경험, 나와 싸워서 결과를 도출하기, 포르셰 같은 걸 생각하면서 요새 지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