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마음 ㅣ 쓸개빠진 년
몸속에 중요하지 않은 장기는 하나도 없는 듯하다.
쓸개는 간 밑쪽으로 위치해 있다. 담즙은 간에서 생성되는데 지방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간에서 생성된 담즙은 작은 주머니 모양의 쓸개에 저장된다. 소화 노폐물 배출 등 소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기이다. 이렇게 중요한 장기에 현대인들의 나쁜 식습관으로 뾰족한 담석(돌멩이)이 생겨 쓸개를 제거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기름진 음식보다는 한식을 즐겨 먹고 소식을 했다. 현대인들의 나쁜 식습관하고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 신랑의 막말을 듣고 싸우고 나면 난 일주일 정도는 먹지를 못했다. 싸운 그날은 신랑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칼날들에 여기저기 상처가 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신랑이 소리를 지르면 내 몸이 덜덜 떨려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상처를 다 받아내고 그 상처들이 나의 소화기관을 망가트렸다. 심하면 이 주일 일주일 정도를 잘 먹지를 못했다. 입맛도 없어지지만, 소화기관이 움직이지 않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굶는 날도 꽤 있었다.
그래도 멀쩡한 듯 웃어 보이는 날이면, 두 아이를 보며 이게 행복이겠지 하며 지냈다. 여느 가정과 같이 놀러 가고 웃어보고 그런 날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생긴 검은 마음은 점점 번져 몸에서 안 좋은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두 아이를 낳고 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좋은 건강검진을 받고 싶었다. 아가씨 때부터 46kg~48kg 사이를 유지하며 지금까지도 지냈다. 신랑에게 건강검진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나 좀 좋은 걸로 건강검진 받아볼까 봐 회사도 안 다니니 받을 일도 없고"
"엥? 40만 원 내고 건강검진을 받겠다고?? 그걸 돈 내고 받겠다고?? 그냥 아픈 데 있으면 병원 가서 검사받고 보험금 받으면 공짜로 받을 걸 왜??"
"..."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무통도 없이 둘이나 낳았고, 첫째는 1년간 완모를 해서 키웠다. 그렇게 내 몸을 몇 년간 혹사시켰는데 40만 원 정도가 그렇게 아까운가? 돈을 내가 벌고 있지 않아서.. 난 그렇게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신랑은 일이 힘든지, 고향으로 발령을 신청했다. 난 너무 가기 싫었다.
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가족이며 친구며 다 여기에 있다. 경상남도 진주라니 내가 그 격한 타지에 가서 어떻게 지내란 말인가. 내 편이 되어주는 것도 아니고 맘대로 사는 남자를 뭘 믿고 내려가나 싶었다. 우는 나를 달래주며 잘 해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어쩔 수 없이 진주로 내려갔다.
한두 달쯤은 잘해주는 듯했으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본인 고향이니 친구들 만나 술 마시고 일도 편해지니 더 술 마시는 횟수가 늘고 늦게 들어오는 날도 늘었다. 그럴 때마다 싸우고 난 몸이 떨리고 상처받고 못 먹는 악순환을 반복해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잠을 자려는데 누우면 속이 너무 쓰렸다. 약을 먹어도 속이 쓰려 따뜻한 팩을 배에 두르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밤을 지새웠다. 많이 예민한 아이였던 둘째가 아직 어릴 때라 꽤 힘들었다. 나의 인내심도 몸도 마음도 바닥을 칠 때가 너무 많았다. 힘들어도 어디 기댈 곳이나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울며 잠들기도 하고 치워도 치워도 다시 어질러지는 집을 보며 넋이 나가는 날도 많았다.
하루는 음식을 넘길 수 없을 만큼의 목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역류성 식도염이 생겼다고 한다. 병원 가기 전까지 그것도 모르고 죽, 누룽지만 겨우 먹으며 아이들을 챙길 수 있는 체력만 둔 채로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아픈 게 그냥 원래 그런가.. 아이 둘 키우느라 힘들어서 그런 건가.. 하며 지냈다.
1년 정도를 나의 몸과 맘을 방치했다. 내 몸무게는 45kg을 찍었다. 종종 가던 동네 내과에서 너무 자주 아파지니 복부초음파와 위내시경을 해보자 제안해 주셨다. 겁이 많던 나였기에 수면 위내시경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 회사 퇴사할 즘 힘들어서 위가 망가졌을 때, 그땐 생으로 위내시경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위내시경을 할 일이 없었는데, 내과 선생님은 나를 아기 다루듯 하면서 불안을 내려주셨다.
수면 위내시경을 한다고 신랑도 데리고 갔다. 그렇게 위내시경과 복부초음파 검사를 했다.
병명은 역류성 식도염, 위염, 쓸개에 작은 담석들이 있는 담석증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정말 놀랐다. 내 몸에 왜 담석들이 있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1년간 그렇게 잠 못 자고 못 먹는 고통이 있었구나.. 이제서야 이해가 되고, 나를 방치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고, 건강검진 비싸다고 못 받게 한 신랑이 너무나 미웠다.
지방에서 수술받긴 싫었다. 부모님도 서울에서 잘 찾아서 받으라 하셨기에 난 열심히 병원을 알아보았다. 큰 병원은 오래 기다려야 했고, 빨리하면서 쓸개 제거 수술을 가장 많이 한 선생님을 찾아보았다. 강남의 한 병원이었고, 혼자 씩씩하게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난 공황장애가 있는데, MRI 기계에 들어가는 게 너무나 무서웠다. 근데 꼭 받아야 하는 검사라 피할 수 없었다. 혼자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중간에 멈추지 않고 다행히 숨 잘 참으며 20분 넘게 MRI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술 날짜를 잡고 난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이란 걸 하게 되었다.
수술 당일 엄마가 오셨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며 수액을 꽂고 기다렸다. 내가 있는 병실엔 다들 쓸개 수술 예정자나 쓸개 수술 후 회복을 하는 사람들 이였다. 나를 데려갈 침대와 남자 간호사가 왔다.
"저 수술이 많이 아픈가요?"
"ㅎㅎㅎ"
말없이 웃기만 하는 간호사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듯했다.
난 쓸게 안에 담석들과 쓸게 벽에 염증이 생겨 두꺼워져 있어서, 수술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배꼽을 열어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1시간 30분 정도 수술을 했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잠든 것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고, 그다음 기억은 차디차고 좁은 수술대에서 "읔!" 하며 깨어난 기억이었다.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그 통증 때문일까 주렁주렁 수액이며 무언가들이 매달려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통증인 거지?? 몸도 추워 바들바들 떨리고 자리에 돌아오니 속이 미친 듯이 쓰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보호자들에게 수술 끝난 환자분들 잠들지 않도록 옆에서 봐줘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난 잠을 들 수가 없었다. 통증이 어찌나 심한지 간호사를 호출해 미친 듯이 속 쓰린 증상을 이야기해서 추가로 주사를 맞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계속되자, 공황장애 증상이 추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저리고 숨쉬기 힘들어져 힘들어했다. 엄마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호사를 호출했고, 집에 있던 아빠를 급하게 호출하셨다. 산소 호흡기를 달아줬지만, 그게 효과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봉지 하나를 요청했다. 이미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이상 진정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무 놀란 엄마는 아빠가 사 온 우황청심환을 먹고 2인실로 옮긴 침대에서 쉬고 계셨고, 그 덕에 난 엄마 아빠랑 함께 밤을 지새웠다.
난 공황장애 증상을 가라앉히느라 잘 수 없었고, 소변을 봐야 하는데 소변을 보지 못해 새벽 내내 병실을 돌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방광이 터질듯한 고통과 여러 가지 통증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희한하게 어두울 땐 더 아프고 불안한 듯하다. 해가 뜨니 여러 가지 통증들이 좀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환자들은 1박2일 정도의 입원만 하고 집에 간다. 나는 상황이 좋지 않아 2박 3일 동안 병원에 있기로 했다. 병원에 있으며 수술한 설명을 들었다. 아니 직접 수술한 장면을 봤다.
쓸개에서 흘러나온 염증들이 주변 장기들을 유착시켜서 인두기 같은 걸로 지지며 장기들을 떼어내는 장면을 봤다. 아.. 저래서 숨을 못 쉴듯한 통증이 있었구나, 생살을 지졌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간 병원에는 친정 식구들만 있었다. 그 외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난 더 쉬기 위해서 친정으로 갔다.
수술하느라 고생했다며 신랑이 꽃다발을 퀵으로 보냈다. 아이 둘 보느라 오지 못한 미안함이었을까? 건강검진 못 받게 한 미안함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엄청난 약들을 먹으며 하루하루 조금씩 회복했다.
그렇게 난 쓸개 빠진 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