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죄명: 아는 것만 늘리고 행하지 않은 죄
[악마 소개]
부에르.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섯 개의 염소 다리를 둥글게 가진 바퀴 모양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철학과 의학, 논리와 도덕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끊임없이 지식을 모아두고 나열하지만, 그 지식은 길을 만들지 못한다.
그의 능력은 ‘지식의 확장’이지만, 그 지식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아 공허한 무더기로만 쌓인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끝없는 공부, 새롭게 쌓이는 지식의 무게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지혜의 바퀴다. 그것은 쌓인 지식을 움직이게 만들어 행동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밝혀라.
부에르: 나는 부에르. 나는 수많은 학문을 탐구했고, 인간에게 철학과 의학을 가르쳤다. 나는 알았고, 나는 가르쳤다. 어찌 내가 죄인이라 할 수 있는가.
철학자: 네 죄명은 지식 과잉과 실천 부재다. 너는 알았으나 행하지 않았다. 지식을 모으는 데 그쳤고, 그 지식을 살아내지 않았다.
부에르: (비웃으며) 아는 것이 힘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힘을 모았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철학자: 아니다. 아는 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힘이 되려면 움직여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너의 지식은 움직이지 못한 돌더미였다.
부에르: 하지만 나는 가르쳤다. 다른 이들이 실천하면 된다. 나는 지식을 전하는 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철학자: 너는 지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쌓아둔 채 방치했다. 진정한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모범이며, 지식은 머리에서 멈추지 않고 발로 이어져야 한다. 네가 멈춘 순간, 지식은 무게만 늘린 족쇄가 되었다.
부에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젖힌다)
족쇄라… 흥미로운 비유로군.
그러나 철학자여, 너는 모르는가?
지식은 언제나 무거운 것이다.
무게가 있다는 건 그만큼 깊다는 뜻이지.
가벼운 자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실천이라 부르며 도망친다.
나는 그 무게를 견딘 자다.
철학자: (눈을 가늘게 뜨며)
아니, 너는 그 무게에 눌려 멈춘 자다.
진정한 지식인은 그 무게를 굴려 길을 만든다.
너는 그 무게를 신격화하며 정당화했다.
그대의 앎은 살아 있는 불이 아니라, 꺼진 불의 재다.
부에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끝으로 허공을 그린다)
불의 재라… 그럼 너는 불길 속에서 얼마나 오래 버텼지?
너는 말하겠지, 실천이 곧 진리라고.
그러나 실천이란 언제나 무지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모르는 자가 움직이고, 알지 못한 채 부딪히며, 스스로를 불태운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들의 실패로부터 배웠다.
그게 더 지혜롭지 않은가?
철학자: (조용히)
너는 ‘행동하지 않는 관찰’을 지혜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냉정한 도피다.
행동은 실패를 동반하지만, 그 실패 속에서 진리가 태어난다.
너는 실패를 두려워한 자다.
알기만 하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자다.
부에르: (비웃는다)
속이는 자라니, 그대의 언어는 너무 단순하군.
나는 인간에게 논리, 의학, 윤리를 가르쳤다.
그들이 내 가르침으로 병을 고치고, 삶을 다듬고, 생각을 바꿨다면,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는가?
나는 씨앗을 뿌렸고, 다른 이들이 열매를 맺었다.
그게 바로 역할의 분업이 아니던가?
철학자: (냉소적으로)
아니, 너는 밭을 보지 않고 씨앗을 던진 자다.
그 씨앗이 자랐는지, 썩었는지조차 보지 않았다.
그대의 지식은 생명을 낳지 않은 정보였다.
살아 있는 지식은 피와 땀으로 흙을 적시는 것이다.
너는 손을 더럽히지 않은 채, 깨끗함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부에르: (미묘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오만하고도 달콤하다)
깨끗함이라… 그렇다, 나는 더럽지 않다.
나는 행위의 실패로 얼룩지지 않았고, 감정의 오염으로 흐려지지 않았다.
나는 순수한 앎이다.
인간이 내게 묻고, 나는 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대도 결국 말로 가르치지 않나?
행동을 말하지만, 정작 손을 움직이지 않는 건 그대다.
철학자: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선다)
그대의 논리는 지식의 교만이 낳은 미로다.
너는 그 안에서 길을 찾는 척하며, 사실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나는 안다’는 말은 너를 신처럼 보이게 했지만,
그 신은 스스로의 무게에 깔려 죽은 자였다.
부에르: (목소리를 낮추며)
나는 신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인간보다 더 많이 아는 자일 뿐.
그것이 죄라면, 무지는 미덕인가?
행동하는 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들은 몰라서 움직이고, 알지 못해 부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멈췄다.
멈춤이 곧 통찰이다.
철학자: (단호하게)
멈춤은 두려움이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결국 변명이다.
너의 ‘앎’은 실천의 결핍을 가리고,
너의 ‘통찰’은 비겁함을 포장했다.
지식이란, 걸어가야 빛을 낸다.
그대의 빛은 자신을 비추기만 했지, 단 한 걸음도 앞을 비추지 않았다.
부에르: (눈을 치켜뜨며, 낮게 웃는다)
그래도, 나 같은 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사고의 기반을 주었다.
그들은 내 어깨 위에 서서 본다.
나는 그들에게 사다리를 주었을 뿐이다.
오르지 못한 건, 그들의 문제지, 나의 죄가 아니다.
철학자: (한숨을 내쉰다)
너는 여전히 모른다.
사다리를 만든 자가 직접 올라보지 않았다면,
그 사다리는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
그대의 지식은 구조 없는 건축물이다.
무너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 견고하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철학자가 바닥을 손으로 쓸자, 모래 위에 작은 원이 그려진다.
그 원은 부에르의 다섯 다리처럼 회전하다가 멈춘다.)
철학자:
이것이 그대의 지식이다 돌고, 쌓이고, 멈춘다.
움직이지 않는 원은 완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감옥이다.
이제 그대의 지식은, 그대 자신을 삼킬 것이다.
(부에르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진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무수한 글자들이 떠오르고,
그 글자들이 무게를 잃은 채 공중에서 떨어진다
책처럼, 논문처럼, 기록처럼.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앎의 잔해만이 공허하게 흩날린다.)
[심판]
철학자는 지혜의 바퀴를 바닥에 굴렸다.
바퀴가 굴러가자, 부에르의 다섯 다리로 된 바퀴 몸체가 흔들렸다.
철학자: 부에르, 이 바퀴는 지식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너는 지식을 쌓아두고 굴리지 않았다. 이제 네 무거운 지식은 너를 짓누를 것이다.
바퀴가 굴러 부에르의 몸을 덮치자, 그의 다리는 뒤엉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외쳤던 수많은 지식의 단어들이 바람처럼 흩어지고, 그의 몸은 돌더미처럼 무너졌다.
부에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더 깊이 이해했을 뿐이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허공에 떠도는 글자들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
부에르:
이건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이건 질서야… 진리야… 이건 내가 만든 완전한 구조다!
행동은 불완전하다. 실천은 언제나 인간의 오류를 낳는다.
나는 그 오류를 정리했을 뿐이야.
나는 혼돈 속의 ‘이론’을 세운 자다…!
철학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아니, 그대는 이론 속에 숨어 혼돈을 피한 자다.
너의 구조는 현실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대의 지식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그대를 감싸는 껍질이 되었다.
부에르: (소리를 지르며)
나는 행동하지 않아도, 행동을 안다!
나는 걸어보지 않아도 길의 원리를 알고 있다!
행동이란 어리석은 감정의 산물이다!
나는 행위를 분석했고, 그 원인을 분해했으며, 그 결과를 예측했다!
그게 어찌 잘못이란 말이냐!
(부에르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그의 머리 위로 책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책들이 바퀴처럼 회전하며 서로 부딪히자, 종이조각들이 폭발하듯 흩날린다.)
부에르:
나는 ‘행동’을 초월했다!
나는 ‘앎’ 그 자체가 되었다!
인간은 나를 흉내 낼 수 없고, 나를 이해할 수도 없다!
나는 사유의 끝에 도달한 존재다!
(웃음이 미친 듯 퍼져나간다.)
하하하하하! 그래, 나는 완전하다! 나는 실천의 부재가 아니라, 완성의 상태다!
철학자: (차갑게)
완전은 곧 정지다, 부에르.
그대의 웃음은 흐르지 않는 강의 메아리일 뿐이다.
지식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너의 앎은 이제 곰팡이가 되어 스스로를 먹는다.
부에르: (몸을 떨며 소리친다)
아니야… 썩지 않아!
지식은 불멸이다!
나는… 나는 수많은 언어를 알고, 수많은 논리를 이해했다!
나는 결코 멈춘 적이 없어! 나는 생각했다!
밤낮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록했다!
그게 어찌 멈춤이란 말이냐!!
철학자: (조용히 걸음을 내디딘다)
생각은 길이 아니다.
길은 걸을 때 생긴다.
그대의 사유는 돌 위에 새겨진 길 움직임 없는 길이었다.
그대의 논리는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현실을 지워버렸다.
(철학자의 말이 끝나자, 바닥의 바퀴가 다시 구른다.
이번에는 부에르의 다리뿐 아니라, 그의 ‘머리’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글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학식, 정의, 인용문, 논문 제목들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채 공중에서 뒤엉킨다.)
부에르: (광기 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안 돼… 안 돼…! 내 지식이… 내 언어가 무너진다…!
내 체계가 무너진다! 내 논리가 흐트러진다!
이건 진리가 아니다! 이건 실수다!
(스스로의 머리를 두드리며)
기억해, 부에르! 질서! 논리! 통제! 분석!
모든 건 설명 가능해야 해!
설명되지 않는 건 존재할 수 없어!
(목이 뒤틀리며 웃는다)
하하하… 설명되지 않는 건, 그냥… 아직 내가 모르는 것뿐이야.
그러니, 내가 모르는 건… 존재하지 않아.
결국, 모든 건… 나 안에 있다…
나밖엔… 없다…
철학자: (숨을 내쉰다)
그래, 이제 너의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었구나.
지식의 끝은 ‘신의 착각’이다.
그대는 신이 되려다, 지식의 감옥이 되었다.
(부에르의 눈이 벌겋게 타오른다.
그의 머리 위에 있던 글자들이 하나둘씩 부서지며, 연기처럼 흩어진다.
그 연기는 그의 입과 코로 스며들며, 그를 질식시킨다.)
부에르: (거친 숨을 내쉬며)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눈이 공허하게 흔들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몸이 완전히 굳어간다.
그 다섯 개의 다리가 엉켜 돌처럼 변하고,
그의 머리에서 새어나온 글자들이 바닥에 부딪히며 파편처럼 부서진다.)
철학자: (무표정하게 중얼거린다)
지식에 미친 자는 결국 ‘모른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앎은 미쳐간다.
(법정의 공기가 무겁게 식는다.
부에르의 무너진 몸 위에는 수많은 글자들이 흩어져 있고,
그 글자들이 천천히 재로 변해 사라진다.
그 재는 바람처럼 흩어져, 그가 남긴 모든 “이론”을 지워버린다.)
철학자: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지식이 도피가 되는 순간,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광기다.
[귀환]
무너진 돌더미 위에 남은 것은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나는 아는 것에만 취해 산 죄인이다. 이제는 지식을 굴려 삶을 움직이겠다."
[교훈]
지식은 쌓이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실천할때 지식이되고,
응용할 수 있을 때 지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