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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위 악마 구시온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11위 악마 구시온 – 지위와 명예에 취한 자

죄명: 허상 위에 앉아 스스로를 높인 죄

[악마 소개]
구시온.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말의 얼굴을 가진 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간에게 지위와 명예를 약속한다고 한다.
그의 능력은 ‘승진과 명예의 허상’이다. 그는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길 갈망하는 욕망을 부추기며, 왕좌에 앉힌다. 그러나 그 왕좌는 허상으로, 앉는 순간 무너진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군중의 환호와 존경의 눈빛이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텅 빈 허상의 왕좌다. 그곳에 앉으면 자신이 누린 명예가 실체 없는 거품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구시온: 나는 구시온. 나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다. 그들은 나로 인해 명예를 좇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켰을 뿐이다. 그것이 어찌 죄인가.

철학자: 네 죄명은 지위와 명예에 취한 것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허상을 약속했고, 그 허상을 진실이라 믿게 했다. 그들이 앉은 왕좌는 곧 무너질 자리였다.

구시온: (웃으며) 그러나 사람들은 원했다. 그들은 명예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들의 소망을 이뤄준 자다.

철학자: 아니다. 네가 준 것은 명예가 아니라 중독이었다. 지위에 취한 자는 자신을 잃고, 남을 짓밟는다. 너는 공동체를 세운 것이 아니라, 파괴했다.

구시온: 명예는 인간의 동력이다. 명예가 없다면 어떻게 삶이 굴러가겠는가.

철학자: 명예는 삶의 열매일 수 있으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네가 만든 왕좌는 허상이고, 그 위에 앉은 자는 곧 추락한다. 너는 추락을 향해 군중을 몰아넣은 죄인이다.

구시온: (비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선동이라… 그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나는 언제나 군중을 움직이는 자였지.
그들은 방향을 몰랐다. 나는 그들에게 ‘위’를 가리켜 주었을 뿐이다.
그들이 허상이라 부르는 그 왕좌조차,
내가 없었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법정의 공기가 묘하게 흔들린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하나의 음성에서 시작되어,
곧 수많은 목소리로 겹쳐진다 — 남자, 여자, 노인, 아이의 목소리가 동시에 말한다.)

구시온의 목소리들:
“위로 올라가라.”
“더 높이, 더 빛나는 곳으로.”
“명예는 신의 선물이다.”
“굴복은 패배요, 상승은 생존이다.”

(법정의 벽이 울린다. 관중석 없는 재판장의 공기가 군중의 함성처럼 진동한다.)

구시온: (손을 펼치며)
들리는가? 이것이 인간의 합창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래를 두려워하고, 위를 동경한다.
나는 단지 그 본능에 불을 붙였다.
그들이 내 이름을 외칠 때, 나는 신이 된다.
그리고 신이 된 나는 그들의 욕망을 정당화한다.
그게 악이라면, 인간의 모든 문명은 악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철학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대의 말은 달콤한 독이다.
그 불은 욕망을 비추지만, 결국 인간의 얼굴을 태운다.
명예의 불꽃은 처음엔 따뜻하지만, 곧 타오르는 허영의 불길이 된다.

구시온: (비웃으며 손을 들어 올린다)
허영이라 부르지 마라. 그것은 진화다.
인간은 나 없이는 멈춘다.
명예를 향한 욕망이 없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땅 위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걷게 했고, 달리게 했고, 싸우게 했다.
나 없이는 왕도, 전사도, 영웅도 없었다.
나는 인간의 동기, 인간의 원동력이다.

철학자: (냉정하게)
아니다. 너는 그들의 열망을 이용해 ‘끝없는 경쟁’을 신으로 만든 자다.
그들이 달린 건 진리를 향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짓밟기 위해서였다.
너의 명예는 빛나지 않았다.
그것은 피로 윤색된 왕관이었다.

구시온: (손을 내리치며)
그 피가 문명을 만들었다!
그들은 싸우며 발전했고, 짓밟히며 배웠다.
나는 그 과정을 가르쳤다.
그것이 진화다, 철학자여.
그대는 고결함을 말하지만, 세상은 싸움으로 움직인다.
나는 그 싸움을 아름답게 포장해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나를 사랑했다.
명예를 잃고 나면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철학자:
그래서 너는 껍데기 위에 왕좌를 지은 것이다.
그대가 만든 ‘명예’는 본질 없는 껍질이었고,
그대의 왕좌는 비어 있었다.

구시온: (광기 어린 웃음으로 외친다)
비어 있다고?
비어 있기에 더 아름답다!
왕좌는 채우기 위한 상징이다!
빈 왕좌를 보고 인간은 꿈꾼다, 욕망한다, 달려간다.
그 공허가 인간을 위로 올린다!
나는 그 공허의 신이자, 그들의 환상의 심장이다!
그대는 나를 부정하지만,
그대의 세계조차 명예 위에 서 있지 않은가?
철학자여, 그대의 이름이 잊히면, 그대의 철학은 남는가?
그대 또한 인정받길 원하지 않나?
그대 또한 박수를 꿈꾸지 않나?

(잠시 정적이 흐른다. 철학자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철학자: (조용히)
그래, 나는 박수를 원한다.
그러나 나의 박수는 증명된 행위 위에 울려야 한다.
너의 명예는 증명 없는 숭배였다.
그대가 만든 왕좌는 공허를 채우지 못했다.
그 위에 앉은 자는 잠시 신이 되었으나,
곧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환호는 기만이었고,
그대의 웃음은 타락이었다.

구시온: (속삭이듯 웃는다)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다.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은,
때로 인간을 더 오래 살게 하지.
나는 단지 그들의 약한 심장을 지켜주었을 뿐이다.

철학자: (눈을 치켜뜨며)
그대는 그들의 영혼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안을 팔았다.
명예는 그대의 상품이었고,
군중은 그대의 시장이었다.
그대는 사람을 구한 것이 아니라, 팔았다.

(구시온의 미소가 굳는다.
그의 얼굴에서 말의 형상이 일그러지며,
귀에서 들리던 환호가 점점 조롱과 비명으로 바뀐다.)

구시온: (이를 악물며)
그들의 환호는 내 것이었다…
그들의 비명도 내 것이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신이다…

철학자: (조용히 한마디 던진다)
신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법정의 공기가 가라앉고,
구시온의 몸이 왕좌의 허공으로부터 천천히 떨어진다.
그가 붙잡으려는 환호의 메아리는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심판]
철학자는 법정 중앙에 허상의 왕좌를 불러냈다.
그 왕좌는 화려해 보였으나, 안을 들여다보니 텅 비어 있었다.

철학자: 구시온, 이 왕좌는 네가 약속한 자리다. 앉아보아라. 네가 무엇을 지켜왔는지 드러날 것이다.

구시온이 비웃으며 왕좌에 앉는 순간, 의자는 무너져 내리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의 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환호의 메아리는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그의 몸은 허상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졌다.

구시온: (허공을 붙잡으며 비명을 지른다)
안 돼…! 이건… 내가 만든 자리야!
이건 내 왕좌야! 내 이름이 새겨진 자리라고!
(손끝이 공기를 움켜쥐지만, 그 허공은 모래처럼 흩어진다.)

구시온:
나를 잊지 마라…!
내가 세운 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찬양한다,
그들의 연설에서, 그들의 훈장에서, 그들의 박수 속에서!
나는 그 속에 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왕좌의 부서진 조각들이 회오리처럼 돌아 그를 감싼다.
그 조각마다 ‘명예’, ‘칭송’, ‘승진’, ‘권위’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철학자: (조용히)
그 단어들이 네 이름을 묶은 사슬이었다.
이제 그것들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구시온: (절규하며 무릎을 꿇는다)
아니, 제발…!
나는 그저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업적을 말할 때,
그 순간 나는 살아 있었다.
그게 죄인가?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철학자:
인정은 존재의 증거가 아니다.
진정한 존재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스스로 선다.
너는 눈을 향한 연극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

구시온: (몸을 웅크리며, 부서진 조각들을 붙잡으려 한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노력했어.
나는 위로 오르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웃었고,
누구보다 정중히 인사했고,
누구보다 화려하게 무릎 꿇었다…
나는 그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한 거야…!

철학자:
그대의 겸손은 연기였고,
그대의 미소는 거래였다.
그대는 명예를 향한 비굴함을 ‘겸손’이라 부르며,
그 안에 숨었다.

구시온: (눈물과 침을 흘리며 고개를 흔든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했지…?
명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도 아니었다.
나는 사라지는 게 두려웠다.
나는 잊히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왕좌를 만들었다.
비록 그것이 허상이었더라도…
적어도 그 위에 앉으면, 나는 ‘누군가’였어…

철학자: (잠시 침묵 후)
그 두려움이 너를 왕으로 만들었고,
그 두려움이 너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왕좌를 만든 손은 인간이었으나,
그 위에 앉은 얼굴은 이미 짐승이었다.

구시온: (떨리는 목소리로)
그럼… 나에게 남은 건 무엇이지?
명예도, 이름도, 왕좌도… 다 사라졌다…
내가 그토록 지켜온 ‘존재의 증거’는 어디 있지?

철학자: (조용히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남은 것은 ‘너 자신’이다.
비굴했던 무릎, 거짓된 미소,
그 모든 위선의 껍질이 벗겨졌을 때 남는 너.
그것이 진실이다.

구시온: (몸을 웅크리며 흐느낀다)
그럼… 그 진실은 너무 초라하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눈 속에서 살고 싶다…
그들이 나를 보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철학자:
그래서 네 왕좌는 비어 있었다.
그대는 스스로 앉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떠받쳐졌기 때문이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구시온의 몸에서 빛이 꺼져간다.
말의 얼굴이 무너져 인간의 형체가 드러나지만, 그 눈빛은 공허하다.
그의 손끝이 여전히 허공을 더듬는다 — 누군가의 시선을 찾듯이.)

구시온: (속삭이며)
…나를… 봐줘…
누구든… 나를… 봐…줘…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남은 것은 텅 빈 왕좌뿐이다.
그 왕좌는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그 위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철학자: (그 빈 왕좌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명예를 위해 무릎 꿇은 자는,
결국 명예조차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귀환]
무너진 자리 위에 남은 것은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나는 명예를 좇아 허상에 앉은 죄인이다. 이제는 빈 왕좌가 아니라, 땅 위에서 나를 세우겠다."


[교훈]
지위와 명예는 열매일 수 있으나, 목적이 될 수 없다. 허상의 왕좌에 앉는 순간, 존재는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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