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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듣는 사람의 품격

말 한다고 다 말이 되는건 아니다.

by 아르칸테

사람들은 말이 대화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화를 깊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침묵은 비어 있는 간격이 아니다.
그것은
말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왜곡하지 않으며,
진심이 머무를 자리를 남겨두는
가장 겸손한 공간이다.

“침묵은 말의 빈자리가 아니라, 진심이 머무는 자리다.”

잘 듣는 사람은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회피는 문을 닫는 것이고,
침묵은 문을 열어두는 일이다.
말을 멈추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받쳐주는 태도다.

많은 사람이 말로 설득하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억에 남지 않는 조언이 아니라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해주는 침묵의 온도다.

잘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만 듣지 않는다.
말의 뒤에 숨어 있는 감정,
멈칫거림 속에 숨어 있는 두려움,
표현되지 않은 욕망과 상처를 함께 듣는다.

그들은 상대가 하지 않은 말까지
함부로 채워 넣지 않는다.
빠르게 판단하지도 않고,
감정의 해석을 앞세워 마음을 잘라내지도 않는다.

침묵은 상대의 마음을 재단하지 않는
최소한의 품격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관계를 넓힐 수 있지만,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관계를 오래 지킨다.
말은 순간의 기술이지만,
침묵은 인격의 깊이에서 나온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의 공간을 지키고,
그 공간을 존중하며,
그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신호들을 읽는다.

이때 침묵은 단순한 비언어가 아니다.
침묵은 인간의 가장 정교한 언어다.
말보다 선명하게 마음을 보여주고,
말보다 정확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침묵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대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상대를 드러내고,
그 드러남을 해석하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 줄 안다.

대화의 궁극은 말이 아니다.
대화의 끝에서 남는 것은
상대가 나와 함께 머무를 수 있었는지,
그 마음이 안전했는지,
그 침묵이 따뜻했는지이다.

침묵은 관계의 품격이자,
말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온도다.

대화를 이끄는 사람은
말로 흐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으로 대화를 지탱하는 사람이다.
말이 흔들릴 때 대화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은
언제나 침묵의 힘이다.

침묵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고,
말을 참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말의 자리를 비워두는
성숙한 태도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 사이에 흘렀던 침묵의 품격이다.

듣는 사람의 품격은
상대가 말하는 순간보다 말하기 전의 두려움을 먼저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누군가가 말을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판단받을까 걱정하고 있다.
품격 있는 경청은
그 두려움을 조용히 덜어주는 일이다.

좋은 경청자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는다.
단순히 인내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마음의 문을 닫지 않도록
“당신은 지금 안전하다”고 말 없는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또한 잘 듣는 사람은
상대의 말에 자신의 경험을 덧씌우지 않는다.
“너도 그랬구나”,
“내가 아는 건…”,
“내가 느끼기엔…”
이런 말들은 자주 위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대의 현실 위에 나를 얹어버리는 행동이다.

듣는 사람의 품격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말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말의 빈틈을 지켜주는 것,
그 틈에서 상대의 마음이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품격은 천성과 감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는 훈련’,
그조차 스스로를 다스리는 윤리의 한 종류다.

현실의 사례


침묵과 경청으로 사람을 살린 이들

침묵과 경청의 품격은
철학서나 교양서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의 리더, 상담가, 교육자, 의료진, 조직 운영자들 가운데
‘말보다 듣기’를 통해 조직과 사람을 살린 사례가 수없이 많다.
그중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훌륭한 상담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

좋은 상담은 말로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침묵으로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말보다 경청의 비율이 훨씬 높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2. 리더십 연구에서 발견한 공통점

세계 여러 조직 연구에서 밝혀낸 사실은 단순하다.
‘뛰어난 리더는 지시하기보다 먼저 듣는다.’
구성원들은 듣지 않는 리더를 두려워하고,
잘 듣는 리더를 신뢰한다.
경청의 품격은 권위를 강화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3. 의료 현장에서의 경청

여러 의료 연구에서,
의사가 환자의 말을 충분히 듣기만 해도
환자의 불안이 크게 줄고
치료 협조율과 예후가 모두 좋아진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확인되었다.
이 또한 경청의 품격이 만든 현실적 효과다.


4. 교육자의 침묵

뛰어난 교사들은
학생이 말문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림의 침묵”을 준다.
이 침묵은 학습 능력보다 더 큰 자신감을 길러준다.


5. 기업 조직의 사례

팀 내 갈등이 깊어진 회사일수록
가장 먼저 회복되는 단계는
“충고가 줄고, 경청이 늘 때”다.
조직은 경청의 양이 많아질수록
갈등이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말을 줄이기 때문에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제대로 듣기 때문에 서로가 가까워진다.




듣는 품격은 결국
상대에게 ‘머물 자리’를 만들어주는 힘이다.
말보다 마음을 먼저 보고,
주장보다 사람을 먼저 인정하며,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말이 없는 순간에도
상대는 “이 사람 옆에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 안정감이 관계를 오래 지키고,
말보다 오래 기억되는 온도가 된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이야기를 담아주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담은 뒤에도
절대로 흔들지 않는 그릇이 되어주는 것이다.

말은 기억에서 흐려지지만,
듣는 품격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존중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깊은 행동이다.

많은 사람은 대화를 하면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 주장을 넣어야 하고,
대화를 이끌어야만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로 설득당했을 때보다,
누군가 우리의 말만 온전히 들어주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고,
더 깊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상대가 많은 조언을 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잘 들어주는 사람은

그 행동만으로 이미 좋은 사람으로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말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걸까?

첫째,
대화를 듣다 보면
내가 하려던 주제가 사라질까 두려워서다.
내 이야기를 놓칠까 불안해지면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한다.

둘째,
정체성이 흔들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설득당하면 안 된다는 마음,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빠르게 말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경청은 자신을 잃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나의 품격을 지키는 행동이다.
침묵 속에서 듣는다는 것은
주도권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화의 중심을 내가 잡는 방법이다.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면
먼저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가진 언어와 비언어,
그 미세한 신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의 말도 설 자리를 얻는다.

경청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이 도착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말을 들어주세요.”라고 부탁하거나 설득하는 것보다 애원하는 것보다
상대가 자연스럽게
“이제 말해주세요.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침묵의 경청은 그만큼 강력하다.
억지로 요구하지 않아도,
상대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말할 준비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하고 삐걱거릴 수 있다.
말을 줄이는 것도, 침묵을 견디는 것도
처음엔 낯설다.

하지만 습관이 되고 반복이 쌓이면
듣는 과정에서 오는 깊은 즐거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대화의 질이 높아지는 경험을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경청은 억지로 말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말을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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