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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순례

서소문 역사공원과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by 애바다

서울 순교 성지 순례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순례길


절두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를 순례하였고, 이미 말씀드렸다. 오늘(2025.04.26., 토 맑음) 은 중림동 약현성당에 이어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순례를 한다. 일정은 다음과 같다.

서소문(소의문) 밖 풍경 (1904, 호주의 사진작가 George Rose)

충정로역 4번 출구> 중림동 약현 성당> 서소문(소의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소문 역사 공원)>명동 대성당>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


서소문(소의문) 밖 지명 유래 (9번 붉은 ㅅ ㅅ ㅁ -서소문 밖 네거리)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 시대의 공식 참형터였다. 정조 사후 천주교도의 처형이 이곳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중 신원이 확인된 이들만 100여 명이 된다. 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이다.


중림동 약현 성당 언덕에서 내려오면 동쪽 약 200m 칠패로 옆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Seosomun Shrine History Museum) 표지판이 있다. 부지 동측 끝 지하로 경의중앙선이 지나가고 북측 밖 도로 지하에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간다. 교통요지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16번)

지상에는 서소문 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하에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Seosomun Shrine History Museum)이 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서소문 밖 네거리 터에 조선 시대 박해로 처형된 천주교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이다. 2019년 6월 개관하였다.

(이하 주요 자료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와 팸플릿에서 옮겨 왔음을 미리 밝힌다. 대략의 역사적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서소문 밖 성지 순례는 처음이고,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게 접하는 정보여서 굉장히 긴장하였다. 처음 방문하시는 분에게는 서소문 밖 성지 순례의 입문서 정도로 참조하셨으면 좋겠다.)



서소문과 만초천 이야기(1)
서소문과 만초천 이야기(2)
서소문 역사 공원(1)
서소문 역사 공원(2), 잔디밭 중앙에 사각형이 몹시 궁금하였다(만초천 바닥? 바닥이 꽤 깊다. 처형장 중심지?)
서소문 역사 공원 (3, 층별 배치 현황)

지상 1층 : 서소문 역사 공원

(순교자 현양비, 뚜께우물-망나니우물, 노숙자 예수상 등)

지하 1층

지하 1층 : 안내, 도서관, 명례방

지하 2층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 경당)

지하 2층 : 기획 전시, 성 정하상 기념경당

지하 2층 성 정하상 기념경당에서 주중 오전 11시, 오후 3시에 미사가 진행된다. 토요일은 주일 특전 미사가 진행된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지하 3층(상설전시실)

지하 3층 : 콘솔레이션 홀, 상설전시, 하늘광장


지상 1층 (서소문 역사 공원)

순교자 현양탑 (신부님 혹은 해설사분의 강의가 진지하다. 마침 비둘기 혹은 매가 공중에 떠있어 예사롭지 않다)
순교자 성인, 순교 복자, 순교자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표지석

1)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부터 1873년까지의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사람 중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44명은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이 되던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성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1984년 현재의 공원 안에 일부 토지를 매입하여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하였다.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기존의 현양탑이 헐리고 1999년 이곳에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현재 44명의 성인과 복자 27명을 비롯해 진리를 입증하다가 희생된 수많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뚜께 우물(망나니 우물)

2) 뚜께 우물(망나니 우물, Lid Well)

조선시대 국가 공식 처형장소에 있었던 뚜께 우물 터다. 우물이 크고 깊으며 물의 양이 많아 늘 흘러내려 평상시에는 우물의 덮개를 덮어 두고 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다.

사형 집행 당시, 망나니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칼날에 뿜어 대며 죄인 주위를 돌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돈을 던져 주며 ‘행하(行下)’라는 팁을 주었다고 한다.

뚜께 우물(망나니 우물) 위치도

고통을 주지 말고 제발 단칼에 죽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뚜께우물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개정(蓋井) 우물이라는 명칭이 되었다. 주변 마을의 이름도 “개정동”이라 불리었다.

노숙자 예수 (Homeless Jesus)

3) 노숙자 예수 (Homeless Jesus, 티모시 슈말츠, 2013)

얇은 담요를 얼굴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하는 노숙인의 모습이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발등에 못이 박혔던 흔적이 보인다. 캐나다 작가 티모시 슈말츠는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에서 영감을 받아 노숙인의 모습으로 예수를 표현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든, 생존경쟁에서 낙오되어 노숙인이 된 사람이든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에 대한 상념을 일깨우고 있다. 노숙자의 모습을 한 예수상이 처음 어느 성당 앞에 설치되었을 때, 신성 모독이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항의를 받아 철거되었다. 하지만 곧 로마 교황청에서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을 설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축복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황청에 이어 스페인의 마드리드, 아일랜드의 더블린, 싱가포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등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만초천, 의주로, 칠패시장, 뚜께우물 / 만초천

4) 만초천과 의주로

서소문 밖 연대기(1)


서소문 밖 연대기(2)

5) 서소문 밖 연대기(조완희 작품)

-. 사람 人자와 서소문의 ㅅ자를, 벽을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의 군상으로 형상화하였다.

-. 칼 형상은 신유 기해 병인박해를 거치며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역사의 흐름을 상징한다.

통의 중심지, 상업적 농업·수산업과 수공업의 발달

3. 성저십리(한성에서 10리-4km 이내의 지역)의 번화한 지역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있었다.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다.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칠패시장과 서소문 밖 시장을 연결했다. 종루가상(鐘樓街上), 이현(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이었다. 특히 어물과 채소가 유명했다.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었다.


4. 국가의 공식 처형지

서소문 밖 네거리는 당고개,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다. 예기 지침에 따라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었다.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깝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 인접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가 있었다.


처음 행형기록은 연산군 10년(1504) 때부터다. 죄인을 이곳에서 능지처참한 후 머리를 베고 시신을 전시하여 뭇사람들에게 보였다. 정조 사후(1800)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처형지였다.


5. 판결 선고 후, 처형장까지 노정

서소문 밖 순교자들은 체포된 후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했다.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혔다. 마지막으로 사령들에 의해 서소문 밖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김효임 · 김효주 순교도

달레 신부(Claude Dharles Daller, 1829~1878)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들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이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6. 한국 최대의 가톨릭 순교성지(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 이후 약 100 년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다.


신유박해(1801)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다.


기해박해(1839)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 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1925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 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광화문 시복식 광경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그 이후 열린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最多)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2018년 9월, 서소문 네거리 순교성지는 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가 되었다.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경당

7. 성 정하상 바오로 기념경당 (지하 2층)

한 집안 내 다섯 식구가 38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서소문 네거리 참형터에서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정하상과 그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세계 교회사안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이루었다.


1801년(신유박해) 정하상의 나이 6세 때, 부친 정약종과 형 정철상이 순교하였다. 1839년(기해박해) 때 모친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 그리고 정하상이 뒤를 따랐다. 1839년 최초의 호교서인 ‘상재상서’를 올려 박해의 부당함을 항변하였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다.

상재상서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 바오로는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 안에 지니고 있었다.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다.

8. 일제강점기 이후의 서소문 밖 네거리

근대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이 지역은 철도 시설 용지로 수용되어 고립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근대 시기 도심의 발달과 함께 종래의 물류와 교통의 요지로서 서소문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이어온 서소문은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부근의 성곽과 함께 철거되었다. 또, 1927년에는 철로 안에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서소문 밖 네거리 조선시대 형장의 흔적이 사라졌다.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는 어물을 거래한 수산시장이 있었다.


조선시대 용산에서부터 만초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이곳 서소문 밖 시장에 드나들어 어물과 조개 등을 팔았다. 현재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의 수산시장이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이전되었다. 1973년에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로 인해 접근이 어렵고, 중구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공영주차장 등이 공원 지하에 건설되어 시민 휴식 공간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201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안에 따라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 본격화되어 마침내 2019년 6월 지상의 역사공원과 지하의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문화 복합 공간으로 개관하였다.

9. 순교자 외 서소문 처형장

임오군란 사실

1) 임오군란의 주동자 원갑식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 효수(梟首)되었다. (1883년)

김개남 효수사실 기록(고종태황제실록)

2) 동학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김개남은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사흘간 효수되었다. 그 외 안교선, 최재호, 성재식은 남벌원(현 충무로 부근)에서 처형된 후 염천교 근처 반석방(盤石坊)에 사흘간 효수되었다. (1895년)

남대문 전투 기록(뮈텔 주교 일기)

3)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저항하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남대문에서 서소문에 걸친 지역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이는 대한제국의 중앙군이 도성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유일한 전투였다. (1907년)

10. 주요 순교 관련 자료

순교자 지석(허계임과 이정희)

1) 순교자 지석(1938년)

모녀지간인 허계임과 이정희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콘솔레이션(위로, Consolation) 홀

2) 콘솔레이션(위로, Consolation) 홀

박해 시기에 순교한 다섯 분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 순교한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공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내부 구조를 모티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하늘 광장

3) 하늘 광장

지하 3층에서 지상의 공원을 넘어 하늘까지 열려 있어 땅과 하늘이 소통하는 의미의 공간이다. 낮에는 햇살 아래 다양한 야외전시, 밤에는 달빛아래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영웅 (이환권 작품)

영웅 (이환권 작품)

왜상기법을 이용하여 한 사람을 길게 수직으로 늘여 놓았다.

서 있는 사람들(정현 작품)

서 있는 사람들(정현 작품)

순교한 44인을 형상화하였으며, 침목으로 만들어져 있다.

좁은 문

좁은 문

순례자의 길을 뜻한다. 약간 오르막길이며, 천국으로 가는 듯한 환상적인 길이다. 반드시 걸어 보시기를 추천드린다.

발아(권석만 작품)

발아(권석만 작품)

비움을 통한 생성을 표현했다. 좁은문에 연결되어 있다.

순교자의 칼(이경순 작품)

4) 순교자의 칼(이경순 작품)

순교자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화하였다.

수난자(최의순 작품)

5) 수난자(최의순 작품)

식민의 유산, 한국전쟁,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순교자의 길(이경순 작품)

5) 순교자의 길(이경순 작품)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사람이 있다.(배형경 작품)

6) 하늘과 대지 사이에 사람이 있다.(배형경 작품)

벽에 머리를 기대어 있는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비추어라! (우측 작품, 김경자, 김의용, 강정조, 손대현 4인의 합동작)

7) 일어나 비추어라!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 시 당부 말씀이다. 순교자 124위 시복 기념하고, 남북통일과 생명문화 회복의 결의와 표징으로 제작되었다.


103위 성인을 위무함(김기희 작품)과 순교자의 무덤(최지만 작품)

8) 103위 성인을 위무함(김기희 작품)과 순교자의 무덤(최지만 작품)


11. 서적 (상설 전시관 전시실)

역사 시간에 듣고 배웠던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성도,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다산 정약용의 3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익의 성호사설, 류성룡의 징비록,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등등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해 척사윤음


기해척사윤음(1839)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서 하늘을 섬기는 방식은 하늘을 업신여기고 모독하는 행위라고 적었다.

천주실의(마테오 리치 신부)

천주실의(마테오 리치 신부, 19세기)

천주교의 유일신을 유교의 상제와 결부해 천주라는 개념으로 소개한 책이다.



병인일기

병인일기


기해일기

성경직해(디아즈 신부)

성경직해(디아즈 신부, 1892)

복음해설서다. 교회력에 따라 주일과 축일을 소개하였다. 한글역 성서의 효시다.

경천(안중근 의사, 1910)

경천(안중근 의사, 1910)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전에 썼다.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린 손도장이 찍혀 있다.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의미다.

<참고 자료>

-.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www.seosomun.org/)

-. 서소문 역사박물관 팸플릿

-. 다음 백과사전


글이 길어져 명동대성당 성지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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