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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 국립 4·19혁명 민주묘지(民主墓地)와 아침이슬

2.28 대구학생시위, 3.15 부정선거(김주열 열사), 4.19 혁명

by 애바다


국립 4.19 민주묘지 주변 안내도(1)
국립 4.19 민주묘지 주변 안내도(2)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명동대성당 성지에 이어 수유리 4.19 민주 성지를 둘러보았다.


약 2년 전 조선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중 마지막으로 경희궁 가는 길(2023.08.13. 일)에 우연히 옛날 돈의문(서대문) 근처의 4.19 혁명 기념 회관( https://brunch.co.kr/@jylee2020/118 )1층을 탐방하였다. 휴관날인데도, 간절한 소망을 담은 한 마디에, 감사하게도 관리자분은 망설임 없이 문을 활짝 열어 주셨다.

4.19 혁명 기념 회관 (도서관)

한때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였던 이기붕의 그 집터 위에 세워진 건물의 정면 외벽에는 “4.19 혁명은 아직도 독재자 이승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언젠가는 수유리 4.19 민주성지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오늘(2025.04.26., 토 맑음)이 바로 그날이다.


충정로역 4번 출구> 중림동 약현 성당> 서소문(소의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소문 역사 공원)>명동대성당> 수유리 국립 4.19 혁명 민주묘지


국립 4·19 민주묘지(國立四一九民主墓地, April 19th National Cemetery)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4.19 혁명 희생자를 위한 국립묘지이다. 명동대성당 탐방 후, 4호선 회현역에서 승차하고 도중에 환승하여 수유역 6번 출구로 나왔다. 1119번 버스를 타고, 국립 4.19 묘지입구 사거리에서 내렸다.

김주열 열사(1943.10.7~1960.3.15, 시민운동가)와 보라빛 수국

4.19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17세 김주열 열사의 사진과 설명판이 보였다. 보라색 수국이 예쁘게 피었다. 제1 묘역(B구역 71호)에 모셔져 있다. 시신의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로의 "4.19"와 "혁명" 상호

4.19로 상가 주변에 "4.19" 숫자와 "혁명" 등 단어가 들어간 상호들이 많이 보였다.

민주성역(民主聖域)

민주성역(民主聖域) 글씨를 세긴 큰 바위덩어리와 석제 조형물이 왼편에 서 있었다. 멀리 북한산의 인수봉이 보였다.

아침 이슬 (김민기 글. 곡) 노래비

아침 이슬 (김민기 글. 곡, 1971년 6월 30일 발표) 노래비

그 민주성역 오른편, 길 건너에 아침 이슬노래비(김민기 작사 작곡)를 2021년 9월에 세웠다. 김민기 님(1951.3.31~2024.7.21, 향년 73세)이 1970년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수유리 공동묘지에서 쓰러져 노숙을 했다.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서 깨어났다. 그때의 벅찬 감동을 시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4.19 혁명 이야기는 아침이슬 노래(김민기 님, 양희은 님)로 시작해야 제격이다.

https://youtu.be/MNGDKW8BgCw?feature=shared

아침 이슬 (김민기 노래)

https://youtu.be/qLg0erjLdxY?feature=shared

아침 이슬 (양희은 노래)

한 때 과거 정권들에 미운 틀이 박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가 해금이 반복된, 시위의 단골 노래다.

아침이슬 노래비(4.19 민주 묘지 진입로 입구 우측)

아침이슬 / 김민기 (글. 곡. 노래)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초대길

초대길

국립 4.19 민주묘지 가까운 주변에는 대한민국 건국 당시 주요 기관의 초대기관장 및 독립운동가였던 애국선열님들의 묘소를 연결한 산책길이 있다. 유림 선생(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초대 부통령), 광복군 합동묘역(최초국군), 김병로 선생(초대 대법원장), 이준 선생(1호 검사), 신하균 선생(광복군, 신익희선생 장남), 신익희 선생(초대 국회부의장)등의 묘소가 있다. 북쪽에는 몇 년 전에 이미 등산했던 북한산성이 감싸고 있고,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동암문 동장대 대동문 도선사등이 둘러싸고 있다.

국립 4.19 민주묘지 정문
국립 4.19 민주묘지 안내도

국립 4.19 민주 묘지 안내

유영봉안소(1)
유영봉안소(2)

1. 유영봉안소 (331㎡)

4·19 혁명 희생자의 유영을 봉안하고 매년 제향 한다. 봉안소안에는 많은 영령분들 유영이 모셔져 있다. 숙연해진다. 감사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제1~제5 묘역

2. 제1~제5 묘역

4·19 혁명에서 희생하신 분들이 안장되신 묘역이다.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혁명에 참가하여 사망하신 분, 4월 19일을 전후한 혁명에 참가하여 상이를 입으신 분, 4.19 혁명 관련 큰 희생을 하신 분들을 모시고 있다.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한민국을 구하셨다.

묘역

안장 수용능력

(총 1,133기. 6,612㎡)

1 묘역 : 216기

2 묘역 : 116기

3 묘역 : 71기

4 묘역 : 160기

5 묘역 : 570기


김주열 학생 묘소 (1 묘역, B구역 71호)

김주열 학생 묘소 (1묘역, B구역 71호)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11일,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 때문으로 밝혀졌다.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제2차 마산시위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붕괴시킨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열사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 도착하여 마을 선산에 묻혔다. 수유리 묘역에는 가묘로 모시고 있는 것 같다.

진영숙 학생 묘소(1묘역, D구역 185호)

진영숙 학생 묘소(1 묘역, D구역 185호)

한성여중 2학년 생으로 4.19 혁명 희생자 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겼다. 숨지기 4시간 전에 유서를 썼다. 부정 선거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와 각오가 담겨 있다. 진영숙 학생은 1960년 4월 19일 밤 8시경, 데모버스에 타고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시위를 했다.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진영숙 학생의 유서

진영숙 학생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

만장

3. 만장

기념탑 좌우뒤편 묘역에 10개씩 서 있다., 4·19 혁명 희생자의 영령을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기념탑과 분향소(중앙), 만장(좌 우 날개)

4. 기념탑 및 분향소

국립 4·19 민주묘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4·19 혁명의 드높은 기상을 표현 기념탑, 참배단, 비문, 군상환조, 군상부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호자상

5. 수호자상

대한의 건장한 남·여 한쌍으로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형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조각상이다.

4월 (박화목)


4월

박화목(朴和穆)


4 월은

거칠은 계절풍이 부는 가운데도

굳은 땅을 뚫고 짓누른 돌을 밀어 제치며

어린 푸른 싹이 솟구치는 달이다.


사월은

정녕 생명의 외침을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는 달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고......


그 누가 착하고 어진 우리를 억누르고

한 몸의 영화를 그 속절없는 부귀를

누리려고 했던가?

썩은 권력은 언제든 허물어지고 마는 것을.....


한 겨우내 죽은 듯

침묵 속에서 살아온 뭇 생명들

이제 활활히 분화처럼 활활히 솟구치나니

아 진정 4월은

부활의 달.

진혼가(조지훈)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박목월)

6. 수호예찬의 비

4·19 혁명을 소재로 발표된 시 중에서 많은 분들이 추천한 12수를, 기념탑 좌우측에 6수씩 각인하였다.

자유의 투사(1)
자유의 투사(2)

7. 자유의 투사

궐기학생과 진압경찰의 대치된 상황을 수평적 구도로 묘사한 조각상이다.

상징문

8. 상징문

철탑으로 기념탑 전면에 좌우 5개씩 위치하고 있으며, 성역공간과 이용공간을 구분한다.

참배대기 광장(다리 좌 우측에 연못이 연결되어 있다.)
연못(한반도 형상, 멀리 보이는 다리를 건너서 참배한다)

9. 참배대기 광장

다목적 광장

10. 다목적 광장

정의의 불꽃

11. 정의의 불꽃

4·19 혁명의 역사적인 의미를 불꽃형상으로 표현한 조각상이다.

4.19 혁명 기념관(1)
4.19 혁명 기념관(2)
4.19 혁명 기념관 내부 배치도(3)

12. 4.19 혁명 기념관 (1,752㎡)

4·19 혁명의 배경과 내용 및 역사적 의의를 알리고 그 뜻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층에는 4·19 혁명의 배경과 내용이 영상매체를 통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4·19 혁명에 대한 정보검색 유물전시코너 등이 있으며, 기념관 3층에는 전망대가 있다.


13. 국립 4.19 민주 묘지 개요

1) 연혁

1961. 2월 :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 결의

1963. 9월 : 묘지준공 및 기념탑 제막

1997. 4월 : 유영봉안소와 4.19 혁명기념관 개관

2005. 7월 : 국립 4.19 민주묘지로 명칭 변경


2) 시설 현황

총면적 : 96,837㎡

성역공간 (29,405㎡) : 묘역 (6,612㎡), 유영봉안소(331㎡), 기념관(1,752㎡)

이용공간 (7,845㎡) : 다목적광장 (3,306㎡), 연못 (1,676㎡), 주차장 (2,863㎡)

산림공간 (59,587㎡) : 잔디밭 (27,200㎡), 산림

상징조형물 : 기념탑 등 11종


3) 안장 대상자

-. 4·19 혁명사망자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한 혁명에 참가하여 사망하신 분

-. 4·19 혁명부상자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한 혁명에 참가하여 상이를 입은 분으로 그 상이 정도가 국가보훈부장관이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1급 내지 7급의 상이등급에 해당하는 신체의 장애를 입은 것으로 판정된 분

-. 4·19 혁명공로자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한 혁명에 참가하신 분 중 4.19 혁명부상자에 해당하지 아니한 분으로 건국포장을 받은 분


4.19 혁명


1960년 4월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 혁명이 일어났다.

광복과 전쟁, 그리고 독재정치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후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1960.2.28~4.18

전개과정

1960. 2. 28 대구학생 시위(출처 : 4.19 혁명기념회관)

대구 2·28 민주운동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 유세가 2월 28일 수성천변에 예정되어 있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대구시민의 유세장 집결을 막고자 일요일인데도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핑계를 대며 대구지역 중·고등학생들을 등교하도록 강제했다.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8개 고교의 분노한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고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와 대구 시내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1960. 2.28~4.19 전국 지역별 시위 현황

대전 3·8 민주의거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196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민주적 저항운동을 하였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으며, 대전지역 고교 학생대표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경찰의 탄압에도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하였다. 대전·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대구 2·28 민주운동 이후, 마산 3·15 의거와 함께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승만 이기붕 정 부통령 유세 벽보, 국회모습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권은 12년간 계속된 장기집권을 연장하려고 미리 선거 조작을 계획하였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겼고,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갑자기 서거하자 이승만의 4선 당선이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켜 당시 86세 고령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하면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을 총동원하였다. 경찰조직을 활용하는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3.15 부정 선거(출처 : 4.19 혁명 기념회관)

부정선거 방법

-. 4할(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 유권자 명부 조작 및 대리투표

-. 득표수 조작 및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 야당 참관인 축출

-. 자유당 완장부대와 깡패를 동원하여 유권자 위협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관이 득표수를 줄여서 발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부정선거 결과, 대통령 이승만 963만 표(85%), 부통령 이기붕 833만 표(73%)로 당선됐다.

김주열 열사(1)
김주열 열사(2)


3.15 마산의거 / 제2차 마산의거(출처 : 4.19 혁명 기념회관)

마산 3·15 의거 (마산 1차 시위)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로 수많은 국민들이 격노하였다.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사망 7명, 중상 1명, 실종 1명(김주열 열사)의 희생자가 나왔다. 또 25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마산 2차 의거( 1960. 4.11,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4.11. (마산 2차 시위)

이승만 정권은 공산당이 마산 시위를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2차 시위를 벌였다. 그 와중에 경찰이 쏜 총탄에 1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상을 입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18 고려대 선언문
4.18 고려대 데모
1960. 4.11~4.18 상황

4·18 고려대 의거 및 피습

1960년 4월 18일 3000여 명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기성세대는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정의·진리 드높이자’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국회 앞까지 진출하여 연좌시위를 하였다.


시위 중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자 학교로 돌아가는 대열에 수많은 시민과 중·고교생이 뒤따랐다.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을 노리고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이 흉기를 휘두르며 습격했다. 200여 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분노한 시민과 중·고·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며 4·19 혁명이 시작되었다.

4·19 혁명 (피의 화요일)

4·19 혁명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중·고등학생, 시민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광화문, 종로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 시위대는 10만 명을 넘었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대규모 시위대가 경무대 앞에 이르자 경찰이 집단 발포하였다. 21명의 희생자와 172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승만 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시위가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날 시위대와 경찰 등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유혈사고 책임을 지고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를 냈다.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만 사퇴하겠다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4.25. 교수단 시위(1)
4.25. 교수단 시국 선언문

4.25. 교수단 시위


거리로 뛰쳐나온 어린 학생들과 여학생 시위대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은 다시 분노하였다.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 258명은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였다. “학생 시위는 정의감과 민족정기의 발로다.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관 등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계엄령 선포

교수단 시위에 힘을 얻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으나 경찰과 계엄군은 시위대를 저지하지 않았다. 교수단 시위는 결정적인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60.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1960.4.27)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승리의 화요일)

4월 25일부터 이승만 정권의 퇴진과 대통령 하야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승만 하야(1960.4.26) /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1960.4.27) / 이기붕 일가 붕괴(1960.4.28)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 책임제 개헌’ 등을 결의했다. 미국 대사와 일부 각료가 거듭 하야를 설득하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1960.5.29)
1960.7.29 (총선거 실시) / 1960. 8.12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 당선) / 1960.8.19 (제2 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장면 취임)

이로써 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획책한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https://namu.wiki/w/%EC%95%84%EC%B9%A8%20%EC%9D%B4%EC%8A%AC?from=%EC%95%84%EC%B9%A8%EC%9D%B4%EC%8A%AC

https://youtu.be/sX-0hnnpm_8

https://youtu.be/PRAm8FOJiQM?feature=shared

아침 이슬 (출처 : 오마이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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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W5arcBUHjKw


<참고 자료>

-. 국립 4.19 민주묘지( www.mpva.go.kr/419/index.do ) 홈페이지

-. 국립 4.19 민주묘지 팸플릿

-. 나무 위키

-. 오마이 TV

-. 다음 백과사전


이상으로 중림동 약현 성당, 서소문(소의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소문 역사 공원), 명동대성당, 국립 4.19 민주묘지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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