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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淸道) 가는 길

물(水), 산(山), 사람(人)이 맑은, 흑석동 고모와 풍각할머니를 찾아

by 애바다
경북 청도군 지도
청도의 물 (水, 운문사 입구 주차장옆)

청도(淸道) 가는 길

경북 청도는 물(水)과 산(山)과 사람(人)이 맑다. 맑은 길이라는 뜻이다. 물이 맑고 산이 푸르며 인심이 좋다고 해서 삼청(三淸)의 고장이라고 불렸다.

청도의 산(山), 운문산(1,195m)
청도의 멋진 젊은이들(人)

맑은 물이 한가롭게 흘러간다. 높은 산 사이로 물길이 평화롭게 흐르고, 사람들의 생활도 그 물길처럼 맑다.

청도 가는 길

비슬산 기슭과 낙동강사이의 고향 시골동네에서 청도까지는 약 30km 거리다. 머리에 백발이 내린 지금까지 한 번도 청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옛날에는 찻길도 없었고 달창저수지와 거대한 비슬산 기슭과 계곡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발걸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옛날에는 두 지역 간의 혼인이 흔했다. 나의 친척할머니가 청도 풍각에서 시집오셨고, 고모가 청도 흑석동으로 시집을 가셨다. 바다에 살던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강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듯, 나의 DNA에도 “청도“가 각인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따름이다. 드디어 그때(2025.05.02, 금, 맑음)가 왔다.


여행 주요 코스는 다음과 같다.

남서울고속터미널->대구 현풍->달창저수지->비티재->경북 풍각->청도역전->운문사->청도역->삼랑진역->전남 순천역->여수밤바다

청도 가는 길

달창저수지 뚝 너머부터 비티재 풍각 청도 그리고 청도역 삼랑진역 순천역까지는 나에게는 초행길이었다. 경전선 구간인 삼랑진역에서 순천역까지는 좌석권이 없어, 입석권을 발급받아 내내 서서 가야 했다. 완행열차 이용에는 아직도 입석권 발매 제도가 있어, 표를 쉽게 구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었다.


역마다 정차하는 완행 밤기차를 탔다. 차창밖의 스쳐가는 마을 불빛을 바라보는 낭만을 즐겼다. 다리가 아프면, 간간히 다음 역까지 빈좌석에 눈치를 보며 앉아 갔다. 여행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경전선 코스를 잡았더니, 좋은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청도 가는 길

고향 마을 사람들은 겨울철 농한기에는 청도 가는 길의 비슬산 계곡에서 땔감을 베어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 해 먹고 소죽을 끓이고 방을 덥혔다.


지금도 달성과 청도 두 접경 지역에는 하루에 고작 몇 번 운행하는 마을버스가 주요한 대중교통수단의 전부다. 그나마 갈아타야 한다. 마침내 연휴기간에 날을 잡아 계획을 세웠다. 일전에 고향방문 때 우연히 알게 된 후배에게 미리 전화로 청도역까지 길안내를 부탁하였다. 그 후배는 청도 가는 길 옆 어느 동네에 친척이 있었고, 몇 번이나 가보아서 길이 휜했다.


당초에는 청도까지 도보여행을 하기로 계획했었다. 부모님의 6.25 피난길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무리라고 했다. 도보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청도 가는 산 길이 나의 오랜 버킷 리스트였기 때문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보고 싶었다.

낙동강 전선

6.25 동란 초기에 낙동강 전선이 한 때 무너졌다. 어릴 적 냇가에서 주운 방망이 모양 쇠붙이(수류탄)를 들고 동네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가지고 놀았다. 들판에서 소 꼴을 베다가 주운 원뿔모양 쇠붙이(포탄 앞부분)를 주워 집안 찬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엿 바꾸어 먹을 심산이었다. 옆집 할머니는 피난살이 끝나고 집에 와서 짐정리를 하였는데, 다락방에 어떤 나라 군인이 숨진 채 누워 있더라고 들려주셨다. 청도 길은 나의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과 부모님에게는 생명을 지켜준 피난의 길, 생명의 길이었다.


Chat GPT에 물어보았다. "피난기간은 1950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풍각천, 청도천에 야영 노숙 움막 생활하며, 냄비로 밥을 해 먹었다. 친척집 혹은 헛간에서 생활하였다. 간혹 곡식을 구하기 위해 몰래 마을로 드나들기도 하였다"라고 한다.


흑석 1리

흑석 1리 (우측, 감나무 밭, 청도는 감이 유명하다)

다섯 살 무렵인가, 엄마가 청도 흑석 고모댁 잔치에 가게 되었다. 나도 따라가겠다고 동구밖까지 엄마 치마를 잡고 떼를 섰다. 그 길이 어린아이가 걸어갈 수 없는 거리인지라, 울고 불고 난리 났던 나를 기어이 떼어놓고 엄마는 갔다. 다음 날부터 해만 뜨면 마을입구 통나무 다리로 가서, 청도 흑석 고모댁에 가셨던 엄마를 기다렸다. 며칠 후 통나무 다리 위에서 냇물로 떨어져 머리가 깨졌다. 된장을 바르고 다녔던 슬픈 일이 있었다.


풍각

풍각 / 충절의 집

풍각에서 시집온 친척 풍각할머니는 농사일에 항상 바쁜 엄마 대신에 나를 업어 키워주셨다. 옆 동네 잔치집에 업고 갔다가 오는 길에 볕 잘 드는 양지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였단다. 시원함에 바르르 떠는 나의 모습이 귀여워 나의 주먹을 입에 넣어 보셨다고 했다. 어디든지 졸졸 따라다니던 강생이(강아지)였다. 지금 내가 손주를 돌봐주는 것도 할머니의 헌신과 뒷바라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셈이다. 한 칸 뛴 징검다리 사랑이고, 내리사랑이다.

청도 비티재 (6.25 눈물 고개)

풍각할머니는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자, 피난을 떠나는 네 살 난 누나와 부모님을 청도고개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그 고개 이름은 비티재 삼거리로 추정한다. 할머니는 누나가 빨간 치마를 입고 고개를 넘는 장면을 나에게 몇 번이고 들려주셨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헤어지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감흥을 “내 영혼이 따스했던 날 할머니”(https://brunch.co.kr/@jylee2020/8 )에서 이미 글로 남겼다. 안타깝게도, 군대 갔던 외아드님이 전사를 하여 원호대상자로서 생활하셨다. 국가에서 인정한 "충절의 집"이란 표찰이 대문에 걸려 있었다.

청도 가는 길

말을 막 배운 나에게 아버지는 청도 호랑이 이야기를 가끔 해 주셨다. "청도에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어머니를 물고 사라졌다. 몇 날 며칠 추적 끝에 대나무 숲 속에서 어머니를 삼킨 호랑이를 발견하고 참나무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 쳐서, 어머니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였다. 어릴 적에는 정말 청도에 사나운 호랑이가 살고 있었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호랑이 사랑은 유별났다. 큰 방 천장 가까운 벽에 호랑이가 대나무 밭에서 포효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셨다. 아마 엄마의 선택인 듯, 그 옆에 앙징스러운 어린 고양이 세 마리가 바구니에 담겨 내려다보는 그림도 있었다. 두 액자는 아침에 눈만 뜨면 보이는 위치에 걸려 있었다.


청도지역 지리에 익숙한 후배의 길 안내와 설명을 들으며 청도역 근처에 도착했다. 어릴 적 추억과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 뒷산 공동묘지와 어릴 적 세상을 떠난 내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통이 열악하고 의료 시설이 전무한 고립된 지역이었다. 현대 의학으로 보면 일반적인 급환으로 초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었다. 뒤로 들은 이야기로는 장례 절차도 없이 어느 날 밤에 마을 어른 몇 분이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서 지게에 짊어지고, 공동묘지에 땅을 파서 묻었다. 봉분도 없었다. 아이들 묘는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을 보는 부모의 가슴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맞다.


친구의 어머니가 포목 점포를 운영하였다. 담임 선생님이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통장 예금을 해지하여, 봉투에 돈을 넣으시면서 꼭 친구 어머니께 전달하라고 하셨다. 여유 있는 집안이라, 거액이었다. 마침 장날 그 점포를 찾아갔지만, 어린 마음에도 차마 직접 전달할 수가 없었다. 한참 점포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마침 동네 아주머니를 만났다. 다행하고 고맙게도 그 아주머니가 그 봉투를 대신 받아 주셨다.


고모님이 살았던 흑석동과 "나의 영혼이 따스했던 날의 할머니"의 고향 풍각 지역을 순식간에 지났다. 그 평범함에 놀랐다. 내가 살았던 곳과 별 차이 없음에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을 했다. 첫사랑처럼 파라다이스, 환상이었던가? 그토록 가보고 싶었고, 그리웠던 곳이었는데.

청도 가는 길

그러나, 여전히 흑석동 고모와 풍각할머니는 나의 우상, 나의 정신적 지주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또 가보고 싶고,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다음번에는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노인정에 들러 그때 그 시절의 피난살이에 대하여 알아볼 생각이다.

"청도의 힘" 황소 상

바쁜 후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헤어졌다. 역내에서 열차 운행시간을 알아보고 나서 청도 분위기를 좀 느껴 볼 요량으로 역 건너편 임시버스정류장에 들렀다. 전광판 운행시간표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마침 어떤 할머니가 운문사로 출발하는 버스 시간표를 읽어 달라고 하셨다.

운문사 및 각 노선 시간표

"11:30분"이라고 말씀드리고 나서, 문뜩 나도 운문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컨테이너형 대기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나도 모르게 운문사로 야유회 가는 듯한 10여 명의 남녀 고등학생들의 줄 뒤에 섰다. 편도 약 1시간 거리로 꽤 먼 산길을 달렸다.

운문사

운문사 경내와 운문사역사문화관을 둘러보고, 오후 4시 운문사 출발 버스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렸다.

청도 시내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청도를 마음껏 느끼고 싶다. 청도역에서 출발, 삼랑진역에서 내려 경전선으로 갈아타서 순천역에서 내려 아지트 숙소에 도착했다.

청도역

다음날 아침 여수 밤바다를 보려 갔다. 옆지기와 막내딸은 예약하고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다는 돌게장에 진심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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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코스>

남서울고속터미널->대구 현풍->달창저수지->비티재->경북 풍각->청도역전->운문사->청도역->삼랑진역->전남 순천역->여수밤바다


대구 달성군 관광 안내도 / 현풍공영버스정류장

현풍공영버스정류장

남서울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대구 달성 현풍(玄風)에 도착하였다. 비슬산 참꽃을 보려면 대중교통 이용 시 거쳐야 하는 장소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선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이곳을 침범한 왜병을 격파하였다. 창녕과 현풍 간의 왜군을 격파하여 대구 방면으로 철수하게 하였다.

노선별 운행시간표

현풍공영버스정류장은 현풍 신길의 현풍중고교 건너편에 있다. 현재의 새 터미널은 2023년 9월 1일부터 운영하고 있다. 옛날 정류장에 비하면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형태다. 자가용 시대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승객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현풍 백 년 도깨비시장 (청춘난장)

현풍 백 년 도깨비시장 (청춘난장)

현풍공영버스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냇가 건너편에 있다. 1918년 3월에 개장하였다. 전통 5일 시장으로 매월 5일과 10일에 열린다. 전통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청년몰이 입점해 있다.

현풍 석빙고

현풍 석빙고

거대한 고분처럼 보인다. 현풍천변(川邊) 북쪽에 있다. 남방향을 하고 있지만 출입구는 언덕을 바라보는 북쪽에 있다. 빙실(氷室) 길이 9m, 너비 5m, 높이 6m, 화강암으로 쌓아 만든 얼음창고다. 출입구는 긴 돌을 다듬어 네모난 문틀을 만들었다.

현풍 석빙고 입구(북측)

안쪽에는 바깥공기를 막기 위해서 강돌로 뒷벽채움을 하였고, 바깥쪽에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진 다음 흙을 쌓아 올렸다. 천장과 벽에는 잘 다듬어진 돌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4개를 틀어 올려 쌓았다. 홍예와 홍예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얹었다.

현풍 석빙고 안내판

얼음방인 빙실의 바닥에는 돌을 평평하게 깔았다. 약간의 경사를 두어, 가운데 부분에 배수구를 놓아서 바닥에 괸 물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도록 하였다. 천장에는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을 위하여 환기 구멍 2군데를 뚫어 놓았다.

현풍 석빙고 내부

바깥쪽에서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구멍 위에 뚜껑을 덮었다. 1982년 11월에 석빙고의 주변을 보수할 때,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되었다. 1730년(영조 6)에 건립되었다.

달창저수지

달창저수지(1963.11.7. 착공~1972년. 12.30 준공)

달창저수지의 명칭은 달성군의 '달'과 창녕군의 '창'을 따서 이름 지었다.

달창저수지 정자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 방학 때 대홍수가 났다. 비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저수지 뚝을 넘었다. 뚝 밑 십여 동네 주민들이 6.25 피난 때와는 반대방향으로 피난을 갔다. 가족과 함께 피난보따리를 이고 지고 소 돼지등 가축을 몰고 고지대로 피난을 갔다. 초저녁때 누군가가 빈 드림통을 뻥 찼다. 뚝이 터져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그 소리에 놀랐다. 사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임무 내용대로, 열 살 차이 젖먹이 여동생을 업고 죽자 사자 고지대 윗 동내로 뛰어 올라간 슬픈 기억이 있다.

달창저수지 주변

중학교 봄 소풍을 달창 저수지 뚝으로 간 적이 있었다. 4월에 벚꽃 축제를 연다. 달창저수지의 길은 나무데크로 조성되어 있어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다. 낚시 가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낚시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호반 더블루(카페)

달창저수지 도로변에 2층 카페가 있다. 특히 2층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별빛과 달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밤풍경이 좋다고 한다.

곽천, 고암

저수지 뚝 위까지는 올라가 보았다. 청도 방향으로 더 이상 가본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생경했다. 청도에 도착하기 전 여러 동네 이름들이 어릴 적 살던 동네의 아주머니들 택호들이 길 안내 교통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고암

이런 곳에서 자라서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셨구나 하면서 웃었다. 성산댁, 운봉댁, 원동댁, 고암댁, 곽천댁, 대티실댁, 본말댁, 후천댁, 안심댁 등등 친숙한 지명이었다.

청도 가는 길

청도 비티재 삼거리

올라갈수록 길이 점점 험해졌다. 도로폭도 편도 일 차선이다. 유동인구가 적고 대중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아 이동이 불편하다. 행정구역이 달라 마을버스 운행구간도 행정구역 경계에 따라 끊긴다. 갈아타야 한다. 꼬불꼬불한 길을 넘어야 한다. 비티재다. 달성군과 청도군의 경계다. 6.25 피난길의 풍각할머니가 빨간 치마를 입은 네 살 큰 누나를 여기까지 업고 와서는 청도로 넘겨 보낸, 눈물 젖은 바로 그 고개다.

청도 레일바이크, 와인터널, 청도읍성

청도읍

청도읍은 대구와 인접한 곳이다.(38km 거리) 경북의 최남단으로 경남과 도계를 이룬다. 행정, 경제 등의 중심이며 청도군의 거점 기능을 가진 지역으로서 읍 전체 농업인구가 많으나 소규모 농공단지와 소재지엔 상설상가와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서 보수성이 강하나 자긍심이 높다. 대구-부산 간 신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대구 근교에서 가장 쾌적한 전원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청도 추어탕

청도인구는 한국전쟁 이후 일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가 꾸준한 감소세를 나타내고 있다. 1966년에 12만 명을 정점으로 1975년 10만 명, 1985년에 7만 명, 1995년 5만 명, 2005년 4만 명으로 계속 감소하다가 2013년에 4만 3천 명을 유지하고 있다. 1985년에 착공해서 1996년에 완공된 운문댐 건설로 7개의 마을이 수몰되었다.

청도읍성 지도

이서국(伊西國)

약 2천 년 전 청도군 일대 청도천과 동창천을 기반으로 존재했던 이서국(伊西國)이 있었다. 지금도 청도군에 이서면이라는 지명이 있다. 구리와 철을 잘 다루었다.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다투던 이서국은 신라가 공격하려 하자 오히려 신라의 수도 금성에 쳐들어갔다.


최근 재현한 이서면의 청도읍성 중심으로, 고령의 대가야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상상해 본다. 궁궐(청도읍성)이 있고, 주변 산에 산성과 왕릉의 흔적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주변에 청도천이 있고, 철 생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Image.jpg 이서국성지(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삼국사기』 지리지 대성군 조에는 “구도성(仇刀城) 경내 솔이산성[率伊山縣, 率已山縣], 가산현(笳山縣[城]), 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성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라고 한다. 이서국(伊西國)의 중심 세력으로 전해지고 있는 솔이산성[蘇山縣]은 매전면 일대로, 가산현[경산성(驚山城), 형산성(荊山城)]은 폐성(吠城), 견성(犬城)이라 전해지고 있는 화양읍 소라리로 보인다. 오도산성은 현재의 유천(楡川) 북쪽 해발 약 500m 지점의 오리산성(烏里山城)[오혜산성(烏惠山城)]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삼국사기 신라본기 14대 유례왕 14년(297년)에는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방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왔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을 머리에 꽂고 적군(이서국 군)을 쳐부쉈다. 그 뒤에 간 곳을 몰랐는데 많은 대나무 잎이 죽현릉(미추왕릉, 삼국유사)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이는 미추왕이 전쟁을 도운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해진다.


이서국은 청도천을 따라 선대의 지석묘(고인돌) 유적을 대규모로 남겨놓았다. 흑석리 마을 앞 논 밭에 검은색의 지석묘가 줄지어 있다. 흑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고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서국은 고조선을 계승한 문화국가로 판단된다고 한다.

청도의 힘 상

황소 싸움상

청도군청 앞에는 청도의 힘을 보여주는 황소 싸움상이 설치되어 있다. 두 마리 황소가 서로 머리의 뿔을 맞대고 밀어젖힌다. 뒤틀린 근육과 드러난 뼈가 싸움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청도 화양읍 삼신리에는 돔 형태의 상설 경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경마장에서 마권을 파는 것처럼 우권을 발매한다. 매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싸움소 100~200마리가 출전해 긴장감이 넘치는 경기를 펼친다.


청도 소싸움은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는 볼거리로, 매년 4월 청도소싸움축제가 거행된다. 1990년대에 시작된 청도의 소싸움은 처음에는 서원천 천변에서 개최되었다. 그 후 2009년부터 실내 경기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운강 고택

그런데 청도의 이런 긴박감과 흥분이 넘치는 이미지는 최근에 생긴 것이다. 청도는 예로부터 맑은 물이 한가롭게 흘러가는 지역이었다. 높은 산 사이로 물길이 평화롭게 흐르고, 사람들의 생활도 그렇다.

자계서원

조선시대에는 안동 지역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유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들은 동창천 주변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래서 청도 지역에는 서원과 고택들이 많이 남아있다. 화양읍에 석빙고가 남아있는데, 이곳 양반들의 권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청도역 구내(1)

청도역

청도역(Cheongdo station, 淸道驛)은 청도읍 고수리에 있는 경부선의 철도역이다. 모든 정규 무궁화호열차와 일부 ITX-새마을이 정차한다. 임시 무궁화호 열차의 경우 통과하는 경우가 있다.

청도역 구내(2)

청도역은 금년 11월 완료 목표로 리모델링 중이다.

청도역 구내(3)
청도 지도

역 구내를 옛날 농촌 모습을 재현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초가집과 황소와 탈곡기가 운치를 더한다.


<참고 자료>

-. 청도군 ( www.cheongdo.go.kr/ ) 홈페이지

-. 청도군 관광안내 지도

-. 청도읍성 팸플릿

-. 다음 백과사전


글이 길어져 청도 9경, 청도 시장, 청도 운문사, 삼랑진역, 순천역, 여수 밤바다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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