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정신의 원광국사, 삼국유사의 일연스님, 비구니 승가대학창립의 명성스님
경북 청도는 물(水)이 맑고 산(山)이 푸르며 인(人) 심이 좋아, 삼청(三淸)의 고장이라고 불렸다.
이번 (2025.05.02., 금, 맑음) 여행의 행선지는 다음과 같다.
남서울고속터미널-현풍-달창저수지-비티재-풍각-청도역전-운문사-청도역-삼랑진역-순천역-여수밤바다
청도 가는 길은 부모님과 네 살 누나와 일가친척과 온 동네 사람들이 6.25 낙동강 전선이 일시 무너지자, 눈물을 흘리며 비티재 고개를 넘어갔던 피난길이었다.
청도역 앞에 도착하였다. 역내에서 순천행 열차 시각을 알아보고 나서, 역 건너편 임시버스대합실을 둘러보았다.
버스 운행시간표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어떤 할머니가 운문사로 출발하는 버스 시간표를 좀 읽어 달라고 하셨다. "11:30분"이라고 말씀드렸다.
느닷없이 뭔가 홀린 기분으로 당초 계획에도 없었던 운문사행 버스를 탔다. 편도 약 1시간 거리로 꽤 먼 산길을 달렸다.
차창 밖 교통표지에 ‘운문댐‘ ’ 화랑정신 발상지’등이 눈에 들어왔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 공간이라는 곳쯤은 알고 있었다. 휑하니 넓은 주차장에 내렸다. 계곡을 흘러가는 맑은 냇물에 산이 비치니 물이 푸르다. 높은 산 정상에 바위가 띠를 두르고 있으니 장엄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같이 버스에 동승해서 내린 고교생 젊은 남녀가 야유회 모임을 위하여 작전타임 준비하고 있으니, 삼박자(水, 山, 人)가 참 잘 어울린다.
최근에 대대적으로 새롭게 정비를 하고 있는 듯, 드넓은 주차장에 매점 화장실 식당 카페 몇 개소가 전부다. ‘운문사 정류장 슈퍼’ 주인분께 버스 운행 시간표를 물어보니, 창문을 가리키며 손 글씨로 종이에 적어 붙여 놓으셨단다. 이심전심, 진심이 전해져 온다.
운문사 주차장발, 청도역행 오후 4시 버스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다짐했었다. 운문사경내 탑방과 운문사 역사문화관 관람 후 시간이 촉박하였다. 처음에는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급기야 막판에는 숨을 헐떡이며 버스를 향해 뛰어야 했다.
주차장에서 운문사입구까지 도보 약 1.4km다. 구름이 운문사를 드리우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의 호거산이 운문사를 둘러싸고 있다.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스님들도 모두 운문사 경내의 불이문 안에서 수행 중이셔서, 한 분도 뵙지 못했다. 다만, 운문사 역사문화관 1층에서 붓을 들고 한시를 짓고 계시는 명성 스님을, 사진으로만 뵙고 왔다.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와 운문승가대학(雲門僧伽大學)이라는 운문사 출입구를 알리는 석주가 두 개 서 있다.
차량통행로 우측 계곡 냇물 바로 옆을 따라 산책하기 좋은 소나무 숲 속 생태탐방로인 솔밭길이 있다. ‘솔바람길’이다. 중간에 법구경 문구가 군데군데 걸려있다.
반성하며 걸어가는 참선의 시간이다.
“이전에는 게을렀더라도 지금 게으르지 않다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법구경)
'지금부터 열심히 살자'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운문사 가는 길 왼편에 사리암(2.3km)과 문수선원(0.8km)으로 가는 산 길이 있다. 운문사입구 범종루 진입 전의 왼편에 근래에 세워진 ‘운문사 역사문화관’이 있다.
운문사 역사
운문사 범종루 우측에 운문사 연혁이 적혀있다.
557년(신라 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5 갑사를 건립하였다.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뿐이다.
그 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 창건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오갑사 운문산 일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이 만들어졌다. 신라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에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 전략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후삼국 혼란기에 폐허가 된 절을 930년 보양국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 대한 보은으로 937년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 결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운문사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 중기 원응 학일 스님이 나라의 제2 선찰이라고 할 정도로 사세를 키웠다. 1277년부터 5년간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면서 운문사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불교정화 직후인 1955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되어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이후 명성 스님이 주지로서 면모를 크게 일신시켜 현재 승가대학과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교육 도량이 되었다.
해방 이후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명성 비구니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대웅보전과 요사 등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인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2024년 현재까지 60회, 20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도량안내
범종루(梵鐘樓)
운문사의 정문이다. 범종루는 2층 누각으로, 법고(法鼓)·운판(雲版)·목어(木魚)·범종(梵鐘·大鐘)의 사물(四物)을 안치했다. 사물은 조석 예불 시에 울린다. 법고는 네발 달린 축생, 운판은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 목어는 수중의 모든 생명, 범종은 지옥과 천당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일체중생들의 성불을 발원하며 울리는 것이다. 이 소리가 각각의 인연 닿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운문사의 수령 500년의 처진 소나무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란다. 어느 선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 막걸리 12말을 희석하여 영양제로 부어준다.
늘 푸른 기상은 수행자로서의 청정함을 상징하고, 넓게 자라서 큰 그늘을 만들라는 가르침을 준다.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보살 정신을 의미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1994년 건립되었으며, 대중 스님들이 조석 예불을 모시는 주 법당이다. 상단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과 대세지, 문수, 보현, 관세음보살 등 사대(四大) 보살을 모셨다.
3일 후 석가탄신일(2025.05.05)이어서, 대웅보전 만세루 앞마당등 운문사 경내 곳곳에 연등이 무수히 걸려 있었다.
만세루(萬歲樓)
신라 원광국사가 초창하고, 고려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차 중창할 때 지었다.
큰 법회시에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대중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로, 2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응진전(應眞殿)
응진(應眞)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의 뜻이다. 16 아라한을 모신 전각이다. 응진은 깨달음을 이룬 이를 뜻한다.
비로전(毘盧殿)
1105년 (고려 숙종 10년) 원응 국사가 건립하였다.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하였다.
오백전(五百殿)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보처 제화갈라보살, 우보처 미륵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공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사슬을 완전히 벗어난 수행자를 이른다.
아라한은 부처님에 대한 별칭이었다. 그 뒤 부처님과 아라한이 구별돼,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게 됐다. 즉 아라한이란 시대적으로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가르침을 받아 깨침을 얻은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소승에서 깨침을 얻은 이를 일러 나한이라 하고, 대승에서 깨침을 얻고 중생 교화에 뜻을 둔 이를 일러 보살이라 칭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운문사 오백전에 모신 오백나한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백나한 한 분 한 분께 각각 공양(마지)을 올리는 오백미 공양이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작압(鵲鴨)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작압전은 전면 측면이 모두 한 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 신승(神僧)이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비로운 까치 떼가 날아오른 것을 본 자리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수행하여 큰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남쪽에 천문갑사·서쪽에 대비갑사·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운문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다섯 사찰을 두고 오갑사(五鴨寺)라고 하였다. 내부에는 보물 제317호 석조여래좌상과 318호 사천왕 석주를 봉안하고 있다.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작압전에 봉안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부처님을 봉안한 좌대와 광배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으로 불상 높이 63cm, 대좌높이 41cm, 광배 높이가 92cm다.
불상은 양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는 통견의 형식이며, 수인은 왼손의 손바닥을 펴서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형태의 항마촉지인(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마왕 파순에게서 항복을 받을 때 취하신 수인으로, 地神이 부처님의 깨친 바를 증명하며 진동을 일으키도록 명하신 자세를 일컫는다.)을 취하고 있다.
사천왕 석주 보물 제318호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조각되었던 것이 파편으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석주 네 기가 각각의 높이가 달라서 정확한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사천왕은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하겠노라 서원을 세우고 수미산의 동서남북에서 악을 물리치는 천신(天神)이다.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비파), 서방의 광목천왕(용과 여의주)이 서 있다. 왼쪽에는 남방의 증장천왕(칼), 북방 다문천왕(보탑)이 지키고 있다.
관음전 앞 꽃산딸나무
관음전 앞에 꽃산딸나무가 활짝 피었다.
관음전(觀音殿)
1105년 원응국사가 중창한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씩인 정사각형 공간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으며 사방의 기둥에 각각 2개씩의 주련을 걸었다.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두 가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 즐거움을 주겠노라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이다. 운문사 관음전에는 1816년에 제작한 수월관음도가 후불탱화로, 1871년에 제작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원응국사가 건립하였고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과 십 대왕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기도 하며, 십 대왕을 모신 전각이라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명부전이라는 명칭은 지장보살과 시왕이 머무르는 곳이 저승세계 즉 명부이므로 이런 명칭을 사용한다.
십 대왕(十大王)은 저승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으로 진광(秦廣) 대왕, 초강(初江) 대왕, 송제(宋帝) 대왕, 오관(伍官) 대왕, 염라(閻羅) 대왕, 변성(變成) 대왕, 태산(泰山) 대왕, 평등(平等) 대왕, 도시(都市) 대왕, 전륜(轉輪) 대왕 등을 일컫는다. 망자가 저승에 다다르면 이들 열 명의 대왕에게 심판을 받아 각각의 업식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절에서 망자를 위해 지내는 재(齋) 의식 가운데 대표적인 49재는 망자가 열 명의 대왕에게서 심판을 받고 윤회하여 다음 몸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인 49일 동안 그의 업식이 맑아지고 보다 부처님의 세계에 가까워지길 발원하는 추모의식이라 할 수 있다.
칠성각(七聖閣)
독성(나반존자), 칠성, 산신 등 세 성현을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전각이다. 독성이라는 불교적 성현 외에도 칠성·산신과 같은 전통신앙의 대상을 불교로 흡수하여 불교가 가진 원융의 성격을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아니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고 한다.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비로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이다. 두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규모와 양식이 동일하다. 탑의 높이는 591㎝이다.
상층 기단의 각 면에 탱주와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탱주로 분할된 여덟 면에는 팔부신중이 1구씩 조각되어 있다. 이런 부처님을 외호하는 사천왕·팔부중·십이지신장 등의 표현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이다.
법륜상
법륜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레가 굴러가듯 머물지 않고 항상 전하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운문사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없으며 세 부분으로 쪼개진 비신을 붙인 다음 철로 된 지지대로 고정하여 지탱시켜 놓았다. 비신의 높이는 230㎝이며 폭은 90㎝이다. 건립 연대는 1145년 전후로 추정된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다. 1144년(고려 인종 22)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불이문
청도 운문사는 일반인 출입이 가능한 예배 영역과 출입이 불가능한 강원 영역이 담장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으며, 두 영역의 연결 통로가 '불이문(不二門)'이다. 불이문은 '둘이 아님'을 뜻하는 불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대립적 개념을 초월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전국 최대의 비구니 수행도량으로서 비구니 교육 전문 승가대학인 운문승가대학과 한문불전 승가대학원, 보현율원 등 비구니 교육 공간이 많다 보니 사찰의 절반 정도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대웅보전, 비로전, 명부전, 만세루 정도만 개방되어 있다. 오래된 옛 건물 금당(金堂, 절의본당)도 교육공간으로 사용해 출입이 금지돼 있다.
금당 앞 석등 (보물 제193호)
운문사 금당 앞에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상대·중대·하대석을 갖춘 기단부와 화사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에 보주가 놓여 있다. 절제된 문양의 조식으로 기단부와 몸체의 비례 및 균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은행나무
수령 400년에 이르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해마다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불이문을 경계로 승가대학 구역 내부, 즉 일반 참배객으로서는 접근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운문사에서는 은행나무 관람을 위해 은행나무가 물들어 최절정에 이른 하루를 정하여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그 날짜는 일정하지 않다.
화랑
신라 원광법사가 600년(진평왕 22년) 중국 수나라로부터 돌아와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는데, 화랑인 추항과 귀산이 찾아와 평생 새겨야 할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임금을 충성으로 모심(事君以忠), 어버이를 효도로 섬김(事親以孝), 믿음으로 벗을 사귐(交友以信), 싸움에 임할 땐 물러섬이 없음(臨戰無退), 함부로 살생하지 말 것(殺生有擇) 등 5가지 계율인 소위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운문사는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됐다.
세속오계는 당시 신라의 시대정신이 됐다. 운문산에 오갑사가 창건할 시기는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 통일을 위해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곳에 화랑도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졌다. 신라가 국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쓴 보각국사 일연스님(1206~1289년)이 1277년 왕명을 받아 운문사 주지로 5년간 머물렀다. 삼국유사 집필을 처음 시작했다.
운문사 역사문화관
운문사 역사문화관은 운문사 경내 범종루 들어가기 전 북측에 있다. 4900㎡ 부지에 연면적 647㎡의 1층 전통기형식으로 최근에 건립된 건물이다.
운문사 연대기를 한눈에 만나는 운문사역사관과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과 50석 불교문화강의실, 작품 수장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은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의 행장이 스님의 육필원고와 서예작품, 지승공예, 일대기 사진 등과 함께 전시돼 있다. 오늘날의 운문사 모습을 건립하고, 비구니 스님의 학습 체계와 도량을 닦고 세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운문사 승가대학 동문 스님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운문사의 대표 문화유산 ‘청도 운문사 동호(銅壺)’가 전시되어 있다.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제작된 항아리로 연꽃잎 뚜껑이나 불꽃모양 손잡이 등 화려하고 품격 높은 불교문화유산이다.
운문사 동호銅壺 (보물 제208호)
청동으로 만들어진 항아리 모양의 불교 용기가 전시되어 있다. 감로준(甘露樽)이라고도 부른다. 용도는 감로수를 담아 놓는 의식용 항아리로 추정한다. 높이는 55㎝, 입 지름은 19.5㎝, 몸통 지름은 31㎝이다. 또한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林椿의 시문집인 서하집이 이 감로준에서 나왔다.
운문사 중수공덕비
입구 우측 잔디광장 끝에는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비가 있다. 2,000여 명이 넘는 비구니 제자를 키워냈다. 사리암과 문수선원을 포함하여 대웅보전, 응진전, 죽림헌, 채경당, 청풍료, 육화당, 화경당, 피하당, 삼장원, 선열당, 전향각, 범종루 등 40 여동을 신축했다. 4개의 수목원을 조성하여 대가람의 중창불사를 이루고 운문사를 국내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가꾸었다.
운문사가 현재의 사격과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명성스님이 운문사에 부임하면서부터다. 명성(明星) 스님 193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48년 강릉여고를 졸업하였다.
1977년부터 1990년까지 제8대~12대 주지 겸 승가대학장으로 주석하면서 운문사 역사상 큰 융성을 이끌었다, 특히 참된 비구니를 양성하는 교육체계를 확립했다.
명성스님은 전통 승가교육방식을 학인 스스로를 교육하는 논강식으로 바꾸고, 전통 교학 과목 외에 사학과 일반교양 과목 등을 추가하여 포교에 필요한 전인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상급과정인 운문사승가대학원(1995)과 보현율원(2008), 운문사한문불전승가대학원(2010)을 설립하여 2023년 현재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국내 최대 비구니 승가대학이다.
명성스님은 매사에 진실하라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을 좌우명이자 교육이념으로 삼았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08년 UN 국제여성의 날에 ‘탁월한 불교여성상’, 스리랑카 종정으로부터 ‘위대한 여성상’ 등 각종 상을 수상했다.
명성스님은 제자 스님들에게 늘 이렇게 말한다.
“매사에 진실하라. 우리가 선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해야 한다.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 운문사 (www.unmunsa.or.kr/ ) 홈페이지
-. 청도군 ( www.cheongdo.go.kr/ ) 홈페이지
-. 청도군 관광안내 지도
-. 다음 백과사전
글이 길어져 청도 9경, 청도 시장, 삼랑진역, 순천역, 여수 밤바다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