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역, 김범우 묘소,밀양 8경,순천 업동저수지, 여수 밤바다 이야기
맑은 물(水)과 푸른 산(山) 그리고 좋은 사람(人)들이 사는 삼청(三淸)의 고장, 청도를 돌아보았다.
청도역에서 다음 행선지 순천역으로 이동하려면, 경전선의 시발역인 삼랑진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밀양시 삼랑진역에 도착(19:03)하였을 때, 저녁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경전선 시점 거리계(표지판)와 급수탑이 보였다. 삼랑진발(19:41) 순천행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어 역 밖으로 나왔다.
역입구에는 철도원 순직비가 세워져 있었다. 성실한 삶을 살다 간 동료를 위한 추모글이 기념비에 세겨져 있었다. 밀양에는 명동대성당 명례방의 주인, 순교자 토마스 김범우 묘소가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 중턱에 모셔져 있다. '김범우기념 성모동굴 성당'이 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찾아뵙고 싶다.
이번 (2025.05.02., 금, 맑음) 여행의 행선지는 다음과 같다.
남서울고속터미널-현풍-달창저수지-비티재-풍각-청도역전-운문사-청도 구(9) 경-청도역-밀양 삼랑진역-순천역-여수 밤바다
밀양(密陽)
밀양(密陽)은 '빽빽이 볕이 들어차 있는 곳'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따뜻하다. 밀양이라는 지명은 용을 뜻하는 옛말인 '미르'에 '벌'(벌판)이 더해진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면서 나왔다고 한다. '용이 사는 들판'의 의미다.
삼랑진역
삼랑진역(三浪津驛)은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다. 철도 경부선과 경전선이 지나간다. 1905년 1월 영업을 개시했다. 경전선(총 300.6km)의 시발역이다. 하루 편도 37편(상행 18편, 하행 19편)의 무궁화호가 정차하며, 이 중 왕복 4편(상하행 4편)은 경전선으로 운행된다.
낙동강 본류와 진주 방면의 남강, 밀양 남천강 등 세 갈래의 물결이 서로 부딪치는 곳이라 하여 삼랑(三浪)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조세 창고가 있던 수로와 육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삼랑진역 급수탑
1923년 경부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름 6m, 높이 15m로 건립했다. 하부는 석조,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다. 석조의 무늬를 나타내기 위해 줄눈을 표시하였다. 위쪽에는 철제 물통실을 설치했다.
삼랑진역 경전선 기점 (표지석)
구간별 개통일을 기록하였다. 우측 멀리 급수탑이 보인다.
삼랑진~마산 : 1905년 05월 26일
순천, 송정리 : 1922년 07월 01일
마산, 진주 : 1923년 12월 01일
진주, 순천 : 1968년 02월 07일
삼랑진역 구내 지하도
구내 지하도를 이용하여 역 구내에 3개의 다른 노선으로 이동할 수 있다. 1번 노선에서 부산 구포 방면, 2번 에서 서울 대전 밀양 방면, 3번에서 경전선(마산, 창원, 순천, 목표) 방면의 열차를 탈 수 있다.
삼랑진역 추모비(“장현호 사우를 추모하며 “)
“시설인으로서 책임을 중시하며 죽음이 다하는 순간마저 철로를 지키며 이곳에서 순직하셨다. 가정에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믿음을 주고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그리운 님“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보았지만 사고 당시의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소주와 음료수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살아생전에 고인이 성실하고 따뜻하며, 가정에서는 자랑스러운 가장이었다. 경건한 마음이 든다.
삼랑진역 대합실
대합실내 TV화면은 12.3 사태 후의 여러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역 대기실 벽에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내는 마음' 글귀가 붙어 있었다. 요즘은 나이 탓인지 이런 글이 소중하게 눈에 잘 들어온다.
화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은 사나운 불보다 무서우니
항상 잘 지켜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복과 공덕을 훔쳐 가는 도둑으로 말하자면
‘화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유교경)
삼랑진역 열차 시간표
19:41 삼랑진역 출발, 22:04 순천역 도착, 무궁화호 밤열차를 탔다.
동대구 서울 경전선(순천, 목포) 열차 시간표(삼랑진역 기준)
부산, 부전 방면 열차 시간표 (삼랑진 역 기준)
남도 해양 열차 시간표 (삼랑진 역 기준)
매주 토. 일요일에만 운행하며, 부산역 출발, 전남 광주 송정까지 가는 남도해양 열차다. 바다를 바라보며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여객 운임표
명동대성당 명례방의 토마스 김범우 순교자, 경남 밀양시 삼랑진에 잠들다
(1751년 5월 22일~ 1787년 9월 14일)
얼마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거로, 명동 성당에서 조문을 했다.(명동대성당 순례, 2025. 04.26, https://brunch.co.kr/@jylee2020/237 ) 김범우 순교자는 생전에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정기모임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의 집 명례방에 1898년에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으로 김범우 순교자가 귀양 간 곳이 단양이다. 그 단양이 충북 단양(丹陽)이 아니라,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의 단장(丹場)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1989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김범우 순교자의 후손 김동환에 의해 무덤의 위치가 밝혀졌다고 한다. 극적으로 김범우 순교자의 외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고 한다. 무덤 안에서 돌 세 개가 십자가 모양으로 발견되었다. 치아가 함께 발견되었으며 유전자 검사 결과를 근거로 김범우순교자성지가 세워졌다.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고 교리 공부를 하다가 형리에 의해 발각되었다. 양반들은 방면되고, 중인 신분이던 그만 체포 심문 형벌을 받아 밀양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장형의 후유증으로 2년 후 사망, 순교하였다.
김범우는 밀양 삼랑진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 살이를 했다. 귀양지에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전교하였다. 샤를 달레 신부는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 “
조선에서 천주교 사건 관련 첫 희생자, 순교자가 되었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지에 살면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다. 훗날 신유박해(1801) 때 김범우의 여섯째 서제 이우는 문초를 받고 장형을 당하던 중 죽었고, 일곱째 서제 현우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작원관지(鵲院關地)
경남 밀양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이곳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군대를 막기 위해 제일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을 펼친 곳이다. 동 남 육로와 남북 수로의 요충지였다. 한양으로 향하는 중요한 첫 길목이었으며, 문경새재가 그다음이었다.
추원재(追遠齋)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숙자(1389∼1456) 선생과 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이 평생을 보낸 집터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임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었다. 사림파의 일시 몰락을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 추증이 논의되었다. 이어 1709년(숙종 3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밀양 얼음골
밀양 천황산 동북쪽에 있는 얼음골은 3~4월 경에 얼음이 맺히기 시작한다. 여름인 7월 말에서 8월 초에 얼음이 가장 많이 생긴다. 반대로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나와 계곡물도 얼지 않는다.
밀양 8경
경남 밀양시는 가곡동, 삼랑진읍·하남읍·단장면·부북면·산내면 등 3동 2읍 11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약 10만여 명의 도시다. 밀양시가 공식 선정한 8 경이다. 초행길의 여행자와 다음 방문할 때의 나를 위하여 밀양시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가져왔다.
제1경 영남루 야경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이다. 특히 강물에 비친 영남루의 야경은 최고의 경치다.
제2경 시례 호박소
가지산에서 오랫동안 흘러내리는 물로 인하여 화강암이 움푹 파여 소가 되었다. 그 모양이 절구인 호박과 같다고 하여 호박소라 한다. 날이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제3경 표충사 사계
표충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재약산의 사계에 따라 변하는 표충사의 경치가 아름답다. 원효대사가 창건할 때는 죽림사(竹林寺)라고 했으며, 1839년(헌종 5)에는 표충사당(表忠祠堂)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표충사(表忠寺)라 하였다.
제4경 월연정 풍경
월영사라 불리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낙향한 월연 이태가 온갖 희귀한 나무와 수석으로 꾸며놓았다.
제5경 위양못 이팝나무
위양못은 신라 때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저수지였다. 정자를 세우고 온갖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특히 이팝나무 꽃이 활짝 피는 5월이면 주변 경치와 어울려 매우 아름답다.
제6경 만어사 운해
삼국유사에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운해는 구름이 덮인 바다를 말한다. 새벽이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땅과 하늘을 운해가 덮는다.
제7경 종남산 진달래
종남산은 밀양시내 맞은편에 있는 안산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활짝 피어 산등성이는 온통 연분홍색이다.
제8경 재약산 억새
표충사 뒤에 재약산이 있다. 산 능선에 사자평 억새와 습지를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NjExveHoT0
밀양 아리랑
어릴 적부터 부르고 다녔던 아리랑 노래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울 너머 총각의 각피리 소리/물 긷는 처녀의 한숨 소리/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늬가 잘나 내가 잘나 그 누가 잘나/구리 백통 지전이라야 일색이지/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랑(阿娘)
밀양 아리랑 전설의 주인공이다. 본명은 윤정옥(尹貞玉)으로, 밀양 부사의 딸이자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를 사모하게 된 한 관노(주기, 朱旗)가 신분차이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이룰 수 없으리라 여겼다. 아랑의 유모와 짜고 아랑을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였다. 아랑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화가 난 관노는 그녀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다.
사랑하던 딸을 잃은 밀양 부사는 낙심하여 부사 자리를 그만두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 후 밀양 부사로 새로 부임하는 사람에게 첫날밤에 귀신이 나타났다. 부사들이 연이어 계속 숨졌다.
급제를 못하고 과객으로만 지내던 '이 상사'란 사람이 자원해 부사로 부임하여 첫날을 맞이했다. 그날 밤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다. 피투성이 처녀 귀신이 방으로 들어왔다. 귀신은 다음날 아침에 마당에 관노들을 소집하여 놓으면, 자신이 나비가 되어 그 범인의 갓 위에 앉아 있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범인을 잡았다. 영남루 대밭에서 아랑의 시신 거두어 좋은 자리에 묻어주었다. 당연히 범인인 관노와 유모를 처형하였다. 그 후로 밀양 부사의 객사에는 더 이상 아랑의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순천역
좌석이 없어 입석표를 끊고 완행열차를 탔다. 어느 구간에서는 빈 좌석에 눈치를 보며 앉아 갔다. 순천역(順天驛)에 도착(22:06)하였다. 아지트에 여장을 풀었다. 2023년 9월부터 전라선 SRT 운행이 시작되어 순천역에서도 SRT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순천의 죽도봉은 언제 보아도 포근하다. 특히 팔각정까지 등산로를 따라 불을 밝혀 놓아, 밤에 보는 야경이 아름답다.
두꺼비 생태계 보전 활동
다음날 아침 용당동 업동저수지를 방문하여 두꺼비 동태를 살펴보았다. 아직 산란기 전이어서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두꺼비 올챙이 탈출 방지막이 알루미늄 물문 공사가 완료되어 안심했다. 판에 올챙이가 빠져나가지 않을 정도 크기의 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홍수시 한꺼번에 물이 산에서 쏟아져 물이 넘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조금 되었다. 그러나, 꾸준하게 개선책을 찾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았다. (슬픈 여행을 떠난 두꺼비 올챙이 이야기, 2024.05.26, https://brunch.co.kr/@jylee2020/167)
여수(麗水)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순행할 때 여수에 왔다. 이 지역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신하들이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을 여수(麗水)라 했다.
여수 이야기는 장범준의 여수 밤바다로 시작해야 제 맛이다. 여수 밤바다, 이 노래로 여수시 관광객이 굉장히 늘었다고 한다. 한 해 평균 약 7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던 여수는 노래가 나온 2012년, 1천500만 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JGzuMLV8tc
여수 꽃돌 게장 1번가
순천에서 여수로 이동하였다. 간장과 양념 꽃게장, 돌게장, 새우장, 전복장을 구경하였다. 2층에 대기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동도, 만성리 해수욕장, 해상케이블카, 돌산대교 등에서 남해바다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옆지기와 막내딸은 여수를 대표하는 음식인 게장에 진심인 것 같았다. 미리 '꽃돌게장 1번가'에 예약했다.
매장에 들어서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돌게장 1번가의 경우 돌게정식, 꽃게정식, 꽃게탕 3가지 메뉴를 취급한다. 더하여 나막스매운탕, 불고기, 도라지튀김, 여수 명물인 갓김치, 양태 등 음식들이 함께 차려진다. 맛도 있어 추천은 하지만, 가격이 만만하지 않다.
화장실에 일회용 칫솔과 치약을 구비해 깔끔한 기분으로 나갈 수 있다. 또 2층에는 식사 공간과 별도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여수 거북선 축제(제59회, 2025.05.03.~05.05)
여수 진남관 아래 이순신 장군 광장 일대에서 매년 거북선축제가 개최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영(약칭: 전라좌수영) 본영이 지금의 여수에 있었다. 전라좌수영 덕분에 조선수군이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여수 거북선 축제는 전라좌수영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정을 했던 1592년 5월 4일을 기념하는 행사다.
1967년에 시작된 거북선축제의 주요 볼거리는 가장행렬인 통제영길놀이, 군대의 상징적 깃발인 둑에 지내는 둑제, 임진왜란 당시 수군들의 고혼 천도를 비는 수륙고혼천도대제 등이다. 수륙고혼천도대제는 해상에서 전몰한 조선, 명나라, 왜의 수군 모두의 넋을 기리는 제사이다.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여러 해전에서 선봉 돌격선으로 출전하여 판옥선과 함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거북선은 두꺼운 목재를 사용하여 선체가 견고하다. 갑판 위에 철갑을 덮은 후 쇠못을 꽂아 적이 배 위로 올라갈 수 없게 하여 공격 능력과 자체의 방호력이 뛰어났다.
거북선은 16개의 노와 2개의 돛을 겸용하여 항해했다. 돛대는 세웠다 뉘었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함포 구멍은 모두 14개다. 좌측과 우측의 현에 각각 6개, 선수의 용머리 부분과 선미의 거북꼬리 부분에 각각 1개씩 있었다.
여러 주차장을 맴돌았지만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였다. 결국 길거리 인파만 보고 지나치며 서둘러 여수 돌산공원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다행히 이미 '여수 여행'이라는 기행문을 써서 보고한 바 있다. (여수 여행, 2023.01.18, https://brunch.co.kr/@jylee2020/96)
여수 돌산공원
돌산공원에서도 워낙 외래 관광객과 방문 차량이 많아 주차하는데, 40분 이상 대기하며 애를 먹었다. 카페와 전망대 케이블카가 끊임없이 여수 밤바다를 아름답게 누비고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이 없어 하멜등대는 못 가봤다. 하멜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다. 아쉬운 마음에 전망대에서 하멜등대 그림의 사진을 담아 왔다.
<참고 자료>
-. 밀양시 ( www.miryang.go.kr/) 홈페이지
-. 밀양시 관광안내 지도
-. 여수시 ( www.yeosu.go.kr/ ) 홈페이지
-. 다음 백과사전
이상으로 청도 가는 길, 운문사, 청도 9경, 밀양 8경, 삼랑진역, 순천 두꺼비 올챙이, 여수 밤바다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