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3)
약 10년 전 전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갔다. 해외 10여 년 근무 중이었다. 우연히 아이들의 여행계획서와 여행지의 각종 팸플릿 뭉치들을 책장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사진 보관계정에 1,500여 장의 제주도 여행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제주도 여행 일정
2015.08.16.(일)
전남 여수공항> 제주 국제공항> 삼양 검은 모래 해변> 만장굴> 산굼부리> 숙소(일출 썬 펜션, 성산일출봉 인근)
2015.08.17.(월)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쇠소깍> 숙소 (제이팜, 오션뷰 좋음, 귤농장 옆)
2015.08.18.(화)
이중섭 거리> 천지연폭포> 주상절리대> 숙소(브라운 캐빈, 핀란드 풍)
2015.08.19.(수)
1100 고지 도로> 신비의 도로> 제주 국제공항> 여수공항
2015.08.18. (화)
제주 최고 기온 31.0도, 맑음. 바람이 많이 붐.
이중섭 거리
40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대향 이중섭(1916~1956)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6.25 피난 시절 제주도 서귀포에 잠시 거주했던 초가를 중심으로 조성된 거리다. 1년도 안 되는 서귀포 생활이었지만,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가족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섭의 노력과는 달리 시대 상황으로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의 가난함과 빈곤함 그리고 애절한 가족 사랑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일대기를 그의 부인과 두 아들 이야기와 함께 잠시 살펴본다. (출처 : 이중섭 미술관 팸플릿과 홈페이지)
1916. 04.10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탄생
1931 오산학교 도화교사 임용련 만나 화가 꿈 키움
1935 일본 제국미술학교(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 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 입학
1936 도쿄 분카가쿠인(문화학원,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 2년 후배 이남덕 만남)으로 옮겨 졸업
1938 자유미술가협회 제2회 전람회 공모전에서 협회상 수상
1940 자유미술가협회 제4회,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등 출품
1941 자유미술가협회 제5회, '소와 여인' 출품
1942 자유미술가협회 제6회,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등 출품
1945 5월 원산에서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1921~2022.08.13)과 결혼
-. 유학시절 2년 후배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분카가쿠인에서 만남. 미술학도, 프랑스 유학 준비 중, 일본 백화점 임원 부잣집 딸)을 만났다. 1945년 4월, 소를 좋아하는 남자 이중섭이 살고 있던 원산으로 관부 연락선을 타고 동해 바다를 건넜다. 2차 세계 대전 전쟁 공습 중 목숨 건 항해였지만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여행이었다”라고 했다.
1946 조선조형예술 동맹 가입
1950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 결성, 회장 됨. 원산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 12월 9일 부산항 도착, 부산수용소 생활
1951 1월 제주도 서귀포 도착 피난생활 시작
-. 아내 이남덕은 처음 일본에서 건너갔을 당시 입은 옷을 이때까지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두 아이를 먹이기 위해 굶는 날이 많았던 만큼 이남덕은 허약해질 때로 허약해져 각혈을 함
-. 서귀포의 환상,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그림
1951. 12월 부산으로 옮김
두 아이에게 먹일 것이 부족했고 끝없는 피난 생활로 아내의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이중섭은 다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고군분투함
1952 종군화가, 은지화 기법 착안
-. 장인 사망통지서를 받음
(차마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한일 국교 수복 전이라 자신이 일본에 입국할 수도 없었다. 아내의 건강이 나빠 슬픈 소식으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음)
-. 아내와 두 아이는 경제적 궁핍을 피하기 위하여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으로 돌아 가 있기로 함
1953 통영 성림다방에서 개인전
-. 장인의 사망 계기로, 경비를 겨우 마련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부인과 아이들을 1주일간 만남
(장인의 유산상속 문제로 본인이 직접 일본에 와야 한다는 통지서를 부인으로부터 받음.
이중섭은 7월 말 구상이 주선해 준 해운공사 선원 자격으로 일주일 정도 일본에 가서 가족을 만남. 본래 선원증으로는 일본 본토에 머물 수가 없었으나 마사코의 어머니가 알고 지내던 농림대신 히로카와 고우젠(廣川弘禪)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여, 단 1주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임시 입국 허락을 받음)
-.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가족과 두 번 다시 재회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함
-. 사후, 부인 이남덕 (마사코)은 한일 국교 정상화 후에 다시 서울을 방문함
(이중섭이 1941년 200여 통 연애편지를 보냈던 그 주소지(도쿄 세타가야)에 살다가 2022년 101세로 생을 마감. 고작 7년을 함께 살았고, 사후 66년을 홀로 지냄. 그녀는 이중섭이 ‘잘생겨서 좋아했다’고 함
1954 진주에서 개인전, 6월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전에 '닭', '소' 출품
1955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 대구 성누가병원 정신과 입원
-. 하루를 국수 한 그릇으로 버티면서도 ‘작업에 몰두하면서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라던 이중섭은 1955년 서울과 대구 전시회가 잇달아 실패하자 절망함
1956. 09.06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숨을 거둠.
(1956년 9월 6일 목요일 오후 11시 45분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지키는 사람 없이 간장염으로 사망.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3일간 영안실 영생의 집에 안치. 사흘 째 되던 날 병원을 찾은 김병기는 이중섭의 사망을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9월 11일 고별식을 가지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 이중섭의 유골은 서대문 봉원사에 일부를 봉안하였다가 망우리의 묘지에 안치. 일부는 박고석이 지니고 갔으며 또 구상이 일부를 수습했는데, 이는 1년 뒤 도쿄에서 있었던 펜 대회에 구상이 참석하게 되자 몸소 모시고 가서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에게 인계하였음)
1957 차근호 작가가 묘비 세움
1978 건국 30주년 기념훈장 추서
1997 서귀포 이중섭거리 선포, 거주지 복원 기념식
2002 서귀포시립 이중섭 미술관 개관
이중섭 화가의 거주지(셋집)
이중섭 거리 초입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이중섭 화가 가족이 피난을 와서 거주한 집인, 이중섭 거주지가 있다. 작고 초라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6.25 때 제주도 서귀포로 가족과 함께 피난을 왔다. 마을 이장이 자기 집의 방 한 칸(1.4평)을 내어 주어 약 1년간 살았다. 마당에 쌓아 놓은 땔감 위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고, 생활을 위하여 의뢰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가난했던 그의 가족은 찬 없이 밥을 먹고, 고구마나 해변에서 잡아 온 게(깅이, 제주도 방언)를 삶아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가족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때로는 결기에 찬 모습을 보였다.
자원봉사하시는 마을 어르신이 이중섭의 '소의 말' 시를 무료로 써 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다. 시간에 쫓겨, 부탁드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쉬웠다.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는 섶섬을 그렸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왼쪽 근경에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돌담과 초가집이 나지막이 자리하고 있다. 담 너머로 이웃집 지붕과 눌, 우영팟(텃밭)과 녹색 귤나무가 보인다. 마당에 보이는 점경 인물과 바다에 떠 있는 흰 돛단배, 새잎이 돋아나지 않은 나무가 봄을 기다린다.(출처 : 이중섭 미술관 팸플릿)
이중섭 (1916~1956)과 서귀포
이중섭 화가는 1951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한국전쟁을 피해 서귀포로 피난 생활을 했다. 서울 중랑구 망우 역사문화공원에 묘소가 있다.
길 떠나는 가족
1.4 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가족은 부산을 경유 제주도 서귀포에 도착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자신과 부인(마사코, 이남덕)과 두 아들이다. 흥겨운 순간을 그린 작품은 거의 유일하다. 서귀포는 그에게 지상의 유토피아였다.
가족 (은지화)
담뱃갑 안의 은박지위에 날카로운 못이나 송곳으로 그림을 그렸다. 송곳으로 파인 홈에 종이가 드러난다. 그 위에 물감을 칠한 후, 얼마 후 물감을 닦아낸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유사하다고 한다.
게와 가족 (은지화)
아이들과 물고기, 게들이 동급을 이뤄 함께 어울리며 끈과 같은 소도구로 연결돼 있다. 공동체 정신과 평화 정신, 범생명주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동아일보)
대향 이중섭 묘소 참배(2025.08.15)
양원역 2번 출구로 나와 중랑캐핑숲을 경유하여 망우묘지공원의 이중섭 묘소를 참배하였다. (묘번 103535)
관련 글은 망우 역사 문화공원 탐방기(https://brunch.co.kr/@jylee2020/248 )에 올렸다.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리에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보니, 아쉽게도 철거 및 장기 휴관(2024.11~2027.02) 안내가 있어 참고하시면 좋겠다. 이중섭 전시공간(창작스튜디오, 이중섭로 33)에서 운영된다고 한다.
"시인 배달부"라는 노란 우체통이 있는데, 우체통옆에 있는 시를 읽고 편지를 남기면 시인이 회신을 해 준다고 한다. 낭만이 있는 우체통이다.
그날에
(제주 서귀포 출신 윤봉택 시인,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FgaQ7JnK-js 유로 김철민)
그 날에 오신다더니
유자 꽃 피어도 아니 오시고
유월에 다시 오신다더니
달맞이 꽃잎만 지네요
바람인 듯 바람일 듯
그 댈 기다리다가
칠월은 가고
가을 기다리다가
겨울 다 지나버리네요
보셔요
동사섭 뜨락에 패랭이꽃 피고
풀잎으로 내려선 이슬이
노래하면 오신다더니
동백꽃이 두 번 피어요
그리운 서귀포
이중섭 거리 곳곳에 시가 살아있다.
그리운 서귀포
(노향림 시인)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맑은 갯벌엔 눈감은 게 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 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 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십여일의 격리 생활을 정리합니다
매달려 있던 링겔도 빼고,,,
덥수룩한 수염도 밀고, 간만에 화장품도 바르고,,,
집에 가면 뜨거운 물에 씻고,
바닷가에 가고 싶습니다
차가움이 밀려들어오는 바닷바람이 부는 곳으로,,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솔동산 문화의 거리
이중섭거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서귀 3리에 있는 언덕길이다. 옛날에 소나무가 많았던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한다. 혹은 서귀진 사장(射場)이 있던 곳으로 활을 쏘는 솔대가 세워진 데서 솔대동산이라고 했고 훗날 솔동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솔동산 거리 상징 조형물인 '활궁'이 있다. '솔동산 8경'이 있다. 방어 유적인 서귀진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공연과 체험 행사가 있다. (한라일보)
천지연 폭포
서귀포 천지연폭포는 조면질 안산암의 기암절벽에서 떨어진다. 폭포 하부에는 화산물질과 해양 퇴적물이 있고, 그 상부에는 약 40만 년 전 분출된 용암이 서귀포층을 덮고 있다.
용암아래 놓인 서귀포층은 폭포수의 침식작용에 의해 깎이면서 점점 깊어져 20m에 이르는 깊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담팔수 자생지와 가시딸기, 송엽란 등의 희귀 식물이 있다. 계곡 양쪽에 구실잣밤나무, 산유자나무, 동백나무 등의 난대성 식물들이 숲을 이룬다.
천연기념물인 무태장어는 뱀장어과에 속하는 열대성 대형 물고기인데, 천지연에서 가끔 발견되고 있다.
주상절리대
제주 서귀포시에 있다. 2005년 1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약 20만 년 전 빙하기, 바다가 아닌 육지였던 이곳에 용암이 흘러나와 표면부터 식으면서 생긴 균열이 점점 커지면서 형성되었다.
해안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약 3.5km에 이른다. 단면에서는 벽화와 같은 아름다운 주상절리가 보인다.
20m 내외로 발달하며 상부에서 하부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고 다양한 형태의 석주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상체의 상부단면은 4-6 각형이다. 오전 9시부터 입장 가능하며 오후 5시 10분에 종료된다.
과거엔 직접 주상절리로 자유롭게 내려가 볼 수 있었으나 국가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엔 훼손을 막기 위해 설치된 관람데크에서만 내려다볼 수 있다. 규모가 무척 크기 때문에 위에서만 바라봐도 된다.
관람 중에 강한 바람이 불어 한 여성 관광객의 모자가 날아가 바닷속으로 비행을 했다. 줍기 위해 데크 밑으로 내려가거나 미끄러지면 큰일 난다.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주변에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중문색달해수욕장, 제주국제평화센터, 천제연폭포, 베릿내오름 등 다른 볼거리도 많다.
브라운 캐빈 (숙소)
한적한 시골 밤길을 한참을 달리자 이국적인 분위기의 숙소가 나타났다. 2000평의 넓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복층 구조의 독립가구의 펜션들과 주인이 사는 관리동이 있다.
브라운 캐빈(핀란드 풍)
제주시 애월읍 소길남길 190-40에 있으며 , 입실은 15:00, 퇴실은 11:00이다.
2015.08.19. (수)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2015.08.19. (수)
제주 최고 기온 30.0도, 대체로 흐림. 바람이 많이 붐.
1100 고지 도로
약 60여 년 전 군사정부 시절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516도로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1100도로는 1968년 이전까지는 사람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험준한 산악 지역이었다.
당시 군사정부에서 516도로 확장 공사를 하고 있을 때, 중문을 개발해야 한다는 지시로 무리하게 진행된 공사였다고 한다. 개발 사업비를 절감하기 위해 국토건설단을 동원하였다. 조직 어깨와 부랑자와 병역 기피자 등을 강제로 국토건설단에 밀어 넣었다. 폭력계를 검거한 후 교화사업 명목으로 노역을 하면 형벌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신비의 도로
신비의 도로 혹은 도깨비 도로로 불린다. 내리막길에 차를 세워두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차가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오르막 쪽으로 뒷걸음치는 기이한 도로다. 사실은 오르막길이 보이는 쪽이 경사 3도가량의 내리막 길이여서 단순 착시 현상에 의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출처 : 제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수박 겉핥기식으로 3박 4일 동안 부지런히 탐방했지만, 제주도의 절반도 못 돌아보았다. 제주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의 행정상 "도"이다. 매력이 넘치는 제주도다. 기회가 된다면, 제주도의 서쪽과 한라산 정상을 꼭 올라가 보고 싶다. 제주살이 1년쯤 하고 싶다. 영구살이면 더 좋겠다.
<참고 자료>
-. 이중섭 미술관(https://culture.seogwipo.go.kr/jslee/leejs/leejungseop.htm) 홈페이지
-.주상절리대(https://koreageoparks.kr/topublic/geoAttr/detail.do?menuNo=501&gaId=156) 홈페이지
-. 브라운 캐빈 (http://browncabin.co.kr) 홈페이지
-. 다음 백과사전
이상으로 만장굴, 산굼부리,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쇠소깍, 이중섭서리, 천지연, 주사절리대등 제주도 여행 이야기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