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공동묘지의 유관순 열사와 대형 이중섭 화가를 찾아서
오늘(2025.08.15. 31도, 오전 흐리고 가끔 비, 오후 화창)은 서울 중랑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와 왕과 왕비의 묘소가 9개소가 있는 구리시 소재 동구릉(東九陵)을 탐방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다. 특히 동구릉 건원릉은 나의 DNA와 관련이 있다.
양원역에서 중랑망우공간(1.5km)까지 노란색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도보로 이동하면, 숲길의 솔향기와 닭 울음소리를 느끼고 들을 수 있다. 도심을 잠시 벗어난 한적한 곳이다.
탐방코스
양원역 2번 출구->중랑캠핑숲->낙이망우교->중랑망우공간->유관순열사 합장묘(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역)->이중섭 묘소(용마약수터)
나이가 듦에 따라,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종착지인 묘에 대하여 관심도 많아졌다. 묘지가 무섭거나 두렵지도 않고, 그곳에 누운 주인공의 삶을 상상하여 본다. 어릴 적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러 고분과 왕릉을 탐방 후 소감은 ‘아등바등해 봤자, 별것 없다.’ 후세인들은 출토된 유물과 봉분 크기와 이름만 기억하고 에피소드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사색의 길’ 4.7㎞ 산책순환로가 조성된 망우공원은 독립영웅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묻혀있다.
오늘은 그분들의 높은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나 자신을 뒤돌아 본다. 특히 유관순 열사와 화가 이중섭의 묘소에 관심이 많아, 일부러 찾아 참배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포함된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와 봉분
중랑망우공간에서 위쪽으로 약 100m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측 길 초입에 있다. 입구 좌우측에 학생들의 추모의 글들이 참배객을 반긴다. 이곳의 작은 봉분에 유관순 열사가 무연고 2만 8천 명과 함께 계신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해 이태원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됐다.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부모님을 잃고 오빠도 옥고를 치르는 등 가족이 풍비박산 나서 이태원 공동묘지의 묘를 돌 볼 사람이 없었다. 일제는 그 와중에 이태원공동묘지를 폐쇄 해체하고, 망우리공동묘지로 모두 이장하게 한 것이다. 후대인으로 참담함과 죄송함이 앞섰다.
효창공원에 모셔진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저절로 떠올랐다. 온겨레의 가슴에 묻었다. 다시는 나라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과 자책을 하였다. 오늘 망우공원에 와서 참배하게 된 주된 이유다.
마침, 갑자기 비가 쏟아져 비석과 봉분 일대가 젖었다. 유관순 열사의 눈물인 듯 풀잎에 물방울이 맺혔다. 일제는 일정기간 유연고 묘지 이장 공고를 낸 후, 시간이 지나자 나머지 무연고자 2만 8천 명 주인공들은 화장 후 이곳 망우리에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를 세우고 한 봉분 안에 합장하였다.
2018년 9월 유관순기념사업회가 기념비를 세우고 때마다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이중섭(대향)
1916. 09. 16. (평안남도 평원군) ~ 1956. 09. 06.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황소’라는 모티브를 통해 분출한 천재 화가이다.
최근 제주도 서귀포 여행기를 썼다. 10년 전 제주 서귀포 이중섭거리를 돌아보았다. 그 후 망우공원의 묘소를 꼭 참배하고 싶었다. 표지판과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묘소 옆 용마 약수터에 작은 음악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묘소입구에 접근금지 표시줄이 있어, 사진을 찍고 참배하였다. 잔디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1956년 9월 6일 오후 11시 45분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지키는 사람 없이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3일간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사흘째 김병기가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 9월 11일 고별식을 가지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유골은 서대문 봉원사에 일부 봉안 후 망우리 묘지에 안치했다. 일부는 박고석이 지니고 갔다. 구상이 일부를 수습하였는데, 1년 뒤 도쿄에 있었던 펜 대회에 참석하게 되자, 몸소 모시고 가서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에게 인계하였다. 1957년 차근호 작가가 묘비를 세웠다.
1978년 건국 30주년에 기념훈장 추서
1997 서귀포 이중섭거리 선포, 거주지 복원
2002 서귀포시립 이중섭 미술관 개관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
구리시와 서울 중랑구에 걸쳐있고, 면적은 망우산 일대 83만여㎡이다. 2004년 공식 명칭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공원)으로 개칭했다. 유관순·안창호·한용운·방정환·조봉암 등 독립지사들이 안장돼 있다.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일제는 이태원공동묘지를 택지로 개발했다. 1936년 2만 8천 기의 모시고 가지 않은 나머지 무연고묘를 화장해 망우리공동묘지에 이장했다.
망우리 공동묘지도 47,700 여기로 만원이 되어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어 1973년 폐장했다. 2004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개칭됐다.
망우공원 역사
1912~1932(일제강점기,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등장)
우리의 전통적 장례문화는 땅에 시신을 묻는 매장문화였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부가 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920년대 전후 서울의 동서남북(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에 부립공동묘지를 설치했다.
1933~1950 (망우리공동묘지의 시작)
서울 동서남북에 있던 공동묘지의 터가 부족해지자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경성부는 망우리 일대의 임야 75만 평을 매입하고 그중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했다. 그 계획에 따라 1933년 6월 10일 망우리공동묘지 시대가 열렸다.
1950~1953(한국전쟁)
전쟁 때 사망한 시신을 시내에 가매장하였다. 서울시는 가매장했던 시신을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 이장을 하였다.
1953~ 1973(격동의 근현대사 속 안식처로 자리매김), 1973년 공동묘지 만원으로 폐장되었다.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40년 동안 묘지 47,700 여기로 가득 찼다. 추석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성묘객으로 인산인해였다. 1973년 더 이상 묘지로 쓸 공간이 없어지면서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1973~ 1990(꽉 차 있던 수만 개의 묘지)
1990년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 위인의 무덤 주변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1990~ 2021(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상의 묘를 찾던 묘지에서 시민들이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힐링의 공간이 되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며 근현대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2021~ 2022(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새로운 출발)
전시·교육·홍보의 역할을 하는 중랑망우공간을 2022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망우역사 문화 공원 주요 인물
유관순 열사
1902.12.16.(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 1920.9.28.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안창호(도산)
1878. 11. 9.(평안남도 강서군) ~ 1938. 3. 10. “내 평생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점진학교, 대성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유상규 군 곁에 묻어다오’라는 유언대로 1938년 망우공원의 태허 유상규 묘 인근에 묻혔다. 그 후 강남에 도산공원을 짓고 도산의 묘를 이장하였다. 망우리에는 허묘를 세워뒀고 비석은 원 자리에 있다.
도산 묘소 일대에 도산의 정신을 따랐던 흥사단원이 함께 누워있다. 도산의 묘 인근에 묻힌 이영학, 도산의 조카사위 김봉성 모두 흥사단원이었다.
유상규(태허)
1897. 11. 10.(평안남도 강계군) ~ 1936. 7. 18.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일한 독립운동가. 의학으로 민족의 건강을 돌보는 공중위생계몽을 실천하였다. 태허는 도산의 애제자이자 외과의사로서 보건위생 계몽에 힘썼다.
한용운(만해)
1879.8.29.(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 1944.6.29. “진실된 애국을 노래하다” 3.1 운동 민족대표이자 승려, 시인.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전개한 독립투사였다.
방정환(소파)
1899.11.9. 서울 ~ 1931.7.23.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어린이날을 지정하였다.
서동일(춘파)
1893. 12. 25.(경상북도 경산) ~ 1965. 4. 26. “다물단의 행동대장”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을 조직하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오세창(위창)
1864. 7. 15.(서울) ~ 1953. 4. 16. “근대 최고의 서화가” 일찍이 언론인으로 개화에 앞장섰으며,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우리나라 옛 서화를 수집하고 정리한 공이 크다.
문일평(호암)
1888.5.15.(평안북도 의주) ~ 1939.4.3. “조선정신의 사학자” 일제 강점기 당시 역사교육의 대중화를 부르짖고 실천했던 사학자 겸 언론인·독립운동가였다.
중랑망우공간
입구 좌측에 안중근의사와 조각가 김진규 선생의 흉상이 있다. 전시·교육·홍보의 역할을 하는 중랑망우공간이 2022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2층 건물이다.
천국 올라가는 계단
기획전시실 : 2층에 광복 80주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2025.04.03.~08.17) 열리고 있다. 독립투사 사진과 한복 저고리가 눈길을 끈다.
전망대 : 하늘 계단 통해 하늘 마당으로 이어지며 트인 전망과 석양을 볼 수 있다.
망우 카페 : 자연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수공간 : 꽃잎과 물의 흐름이 있는 공간이다.
망우미디어홀 : 전시 홍보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사색의 정원 : 한가로이 거닐 수 있다.
셔틀버스
양원역~중랑망우공간 운행 셔틀버스
근심 먹는 우체통
<참고 자료>
-. 망우 역사문화 공원 (https://manguripark.or.kr ) 홈페이지
-. 망우 역사문화 공원 안내 지도
-. 망우 역사문화 공원 중랑망우공간 상반기 기획전시 팸플릿
-.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팸플릿
글이 길어져, 구리시 동구릉 참배 이야기는 다음 회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