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의 구리(九里) 건원릉(健元陵)을 찾아서
서울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의 유관순 열사와 대향 이중섭 묘소 참배 후, 조선 왕과 왕비의 묘소가 9개소가 있는 구리시 소재 동구릉(東九陵)을 탐방했다.(2025.08.15. 31도, 오전 흐리고 가끔 비, 오후 화창) 동구릉 건원릉은 나의 DNA와 관련이 있다.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진한 감동이 왔다.
경내를 일순하고 출구인 매표소 근처에서 점검하여 보니, 목릉 탐방을 누락하였다. 건원릉에 집중하다 보니, 바로 옆 선조의 목릉을 빠뜨린 것이다. 급히 되돌아가서 건원릉 홍살문에서 우측 숲길로 다시 올라갔다.
아래 글 주요 내용 및 자료는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https://royal.khs.go.kr/) 홈페이지 및 팸플릿등을 참조하였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 시대에 조성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다.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다. 40기는 남한, 2기는 북한에 있다. 조선 왕은 모두 27명이다. 왕과 왕비 그리고 후세에 추존된 왕과 왕비를 포함 73명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했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孝)와 예(禮)를 갖추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의 명당을 선정하였다. 역사적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남한 소재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 한양의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다.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에서 능역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조선왕릉의 기본 구성
기본 형태가 정해져 있어, 대동소이하다. 시대 상황과 지리적 여건, 인원수에 따라 기본 구성요소에서 몇 개를 생략하거나 약간 변형하였다.
금천교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
홍살문 :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
향로 :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좌측, 관람객이 걷는 것을 삼가라는 안내문 있음)
어로 : 왕이 다니는 길(우측, 관람객이 걸어도 된다는 안내문 있음. 향로에 비해 약간 좁다.)
판위 : 왕이 참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잠시 대기하는 공간
신로 : 정자각 뒤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
수라간 : 좌측, 음식 준비하는 건물
수복방 :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건물. 어로 향로를 기준으로, 수라간과 수복방은 마주 보고 세워져 있다.
기신제(건원릉)
정자각 : 제향을 지내는 건물
예감 : 축문을 태우는 곳
비각 : 왕의 행적 적은 신도비나 표석 보호 건물
산신석 :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
무인석, 문인석,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호, 석양, 곡장, 병풍석, 봉분
동구릉(東九陵)
동구릉(東九陵)은 한양의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이다.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동구릉은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1. 건원릉(健元陵) 1408년 태조의 건원릉(단릉, 單陵 )
2. 현릉(顯陵) 1452년 문종(5대)과 현덕왕후의 현릉. (동원이강릉, 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능)
3. 목릉(穆陵) 1608년 선조(14대)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릉(동원이강릉)
4. 휘릉(徽陵) 1688년 인조(16대)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의 릉(단릉)
5. 숭릉(崇陵) 1674년 현종(18대)과 명성왕후의 릉 (쌍릉, 雙陵))
6. 혜릉(惠陵) 1720년 경종(20대)의 단의왕후의 릉(단릉)
7. 원릉(元陵) 1776년 영조(21대)와 정순왕후의 릉 (쌍릉)
8. 수릉(綏陵) 1855년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릉(합장릉, 合葬陵)
9. 경릉(景陵) 1849년 헌종(24대, 문조와 신정왕후의 아들)과 효현왕후, 효정왕후릉의 릉(삼연릉,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능침을 나란히 조성한 능)
1. 건원릉(健元陵, 태조)
1408년(태종 8) 조성(단릉)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다.
왕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여 명의 군정(軍丁)이 참여하였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가 덮여있다.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함흥의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에 세운 신도비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표석이 세워져 있다.
▷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 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다.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였다. 고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결정되었다.
태조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왕위에서 폐위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들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둘째 아들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태상왕이 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 때 ‘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건원릉 정자각은 1408년(태종 8)에 처음 지어졌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다.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신도비는 왕과 왕비 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신(碑身, 몸통)과 귀부(龜趺, 거북이 받침), 이수(螭首, 용을 새긴 머릿돌)를 갖추고 있다. 건원릉 신도비는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건원릉을 조성한 이듬해(1409년)에 세웠다. 앞면의 비문은 권근이 짓고,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은 정구의 글씨, 뒷면의 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앞뒷면은 성석린의 글씨이다. 조선 초기 신도비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조성 연도 : 1452년(단종 즉위), 1513년(중종 8)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현릉(顯陵) 이야기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문종이 1452년(문종 2)에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들이 여러 왕릉 자리를 답사하여 지금의 자리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앞서 1441년(세종 23) 현덕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 안산에 묘(소릉昭陵)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 다음 해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옮기게 되었다.
▷ 문종(文宗) 이야기
문종(재세 : 1414년 음력 10월 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 재위 : 1450년 음력 2월 2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의 첫째 아들로 1414년(태종 14)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1418년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종 재위 말년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민생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병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1452년(문종 2)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 현덕왕후(顯德王后) 이야기
현덕왕후 권 씨(제세 : 1418년 음력 3월 12일 ~ 1441년 음력 7월 24일)는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 씨의 딸로 1418년(태종 18)에 홍주(충남 홍성) 합덕현 사저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 세자 후궁으로 승휘(承徽, 종 4품)가 되었고, 양원(良媛, 종 3품)을 거쳐 1437년(세종 19) 왕세자빈이 되었다.
세종은 이미 자식이 있고 후궁의 서열 중에 가장 높은 양원 권 씨를 왕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뜻을 밝혀 권 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41년(세종 23) 원손(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24세로 세상을 떠났고,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로 추존되었다.
3. 목릉(穆陵,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조성 연도 : 1600년(선조 33), 1630년(인조 8), 1632년(인조 10)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목릉(穆陵) 이야기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 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 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처음 목릉 자리에는 의인왕후의 능(유릉裕陵)이 조성되었다. 8년 뒤 1608년 선조의 능(목릉)을 건원릉 서쪽 언덕(현 헌종 경릉)에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로 의인왕후의 능 서쪽 언덕으로 옮기고 능의 이름을 목릉으로 고쳤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목릉 동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었고 능의 이름을 혜릉(惠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목릉과 능역이 가까워 따로 능의 이름을 정하지 말고, 목릉 능역으로 합치자는 논의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 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자식이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 명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재위 초반에는 양어머니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으며,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이황, 이이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까지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쟁 전후 복구작업을 하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현 덕수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의인왕후 박 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 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여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선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 후궁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 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인목왕후 김 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 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선조 39)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618년(광해군 10)에는 왕대비의 자리에 폐위되어 경운궁에 유폐되고 그 호칭을 서궁이라 하였다. 1623년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있던(현 헌종 경릉) 선조의 목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진 것이다. 이때 새로 옮겨온 정자각에서 의인왕후 능침까지 신로(神路)를 연결하였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져 있고, 17세기의 건축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4. 휘릉(徽陵, 인조비 장렬왕후)
조성 연도 : 1688년(숙종 14)
왕릉 형식 : 단릉
▷ 휘릉(徽陵) 이야기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 씨의 능이다.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석상(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 이글 끝부분의 동구릉 역사문화관 참조 요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휘릉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翼廊)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장렬왕후 조 씨(재세 : 1624년 음력 11월 7일 ~ 1688년 음력 8월 26일)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 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인조 13)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예송(禮訟)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되어 있다. 제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 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5.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조성 연도 : 1674년(숙종 즉위), 1684년(숙종 10)
왕릉 형식 : 쌍릉
▷ 숭릉(崇陵) 이야기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현종, 오른쪽(동쪽)이 명성왕후의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다.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이 각각 1개씩 놓여 있고,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 현종(顯宗) 이야기
현종(재세 : 1641년 음력 2월 4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 재위 : 1659년 음력 5월 9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은 원손이 되었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이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고,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두 차례의 청나라 침략의 피해로부터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1647년(현종 15)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 명성왕후(明聖王后) 이야기
명성왕후 김 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 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 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숙종 즉위)에 지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팔작지붕의 정자각이다. 숭릉 정자각은 17세기 왕릉 정자각 건축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6. 혜릉(惠陵, 경종비 단의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718년(숙종 44), 1722년(경종 2)
왕릉 형식 : 단릉
▷ 혜릉(惠陵) 이야기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 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고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되어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숙종의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에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능침의 장명등은 없어져 터만 남아 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야기
단의왕후 심 씨(재세 : 1686년 음력 5월 21일 ~ 1718년 음력 2월 7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 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왕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7.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조성 연도 : 1776년(정조 즉위), 1805년(순조 5)
왕릉 형식 : 쌍릉
▷ 원릉(元陵) 이야기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 씨의 능이다.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을 세웠는데, 가장 왼쪽의 표석(1 비)은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원릉을 조성할 때 세운 ‘영종대왕’ 표석, 가운데 표석(2 비)은 고종 대에 영조로 추존하고 세운 ‘영조대왕’ 표석, 가장 오른쪽의 표석(3 비)은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재세 : 1694년 음력 9월 13일 ~ 1776년 음력 3월 5일, 재위 : 1724년 음력 8월 30일 ~ 1776년 음력 3월 5일)는 숙종과 숙빈 최 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노론과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큰 과제로 삼아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身貢)을 혁파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였다.
1762년(영조 38)에는 왕세자(사도세자, 추존 장조)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왕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오래 재위(52여 년)하였다.
▷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김 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 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영조 33)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은 일화이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시대의 정책을 일부 계승하였고, 무리하게 행해졌던 정책들을 다시 정리하였다. 이후 1804년(순조 4)에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다음 해인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8. 수릉(綏陵,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조성 연도 : 1830년(순조 30), 1834년(헌종 즉위), 1846년(헌종 12), 1855년(철종 6), 1890년(고종 27)
왕릉 형식 : 합장릉
▷ 수릉(綏陵) 이야기
수릉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와 신정황후 조 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황제)이 왼쪽, 왕비(황후)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30)에 세상을 떠나, 묘를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1855년(철종 6) 다시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되었다.
수릉의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연경묘 시절에 만들어진 문석인으로,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 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 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 문조(文祖) 이야기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황후 김 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사(대리청정)를 돌보았다.
왕세자는 외척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 신정황후(神貞皇后) 이야기
신정황후 조 씨(재세 : 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음력 4월 17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 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 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헌종을 낳은 지 3년 만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철종 8) 순조의 왕비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양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수렴청정 기간에 남편 문조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1866년(고종 3)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되었다.
9. 경릉(景陵, 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
조성 연도 : 1843년(헌종 9), 1849년(철종 즉위), 1904년(광무 7)
왕릉 형식 : 삼연릉
▷ 경릉(景陵) 이야기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왕비 효현황후 김 씨, 두 번째 왕비 효정황후 홍 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앞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황후, 오른쪽이 효정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을 따로 배치하였다.
▷ 헌종(憲宗) 이야기
헌종(재세 : 1827년 음력 7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 재위 : 1834년 음력 11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효명세자)와 신정황후 조 씨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834년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8살의 어린 나이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할머니 순원황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외척 세도정치와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사회적으로도 혼란하였다. 또 두 차례의 천주교 탄압(기해박해, 병오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후 1849년(헌종 15)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로 추존되었다.
▷ 효현황후(孝顯皇后) 이야기
효현황후 김 씨(재세 : 1828년 음력 3월 14일 ~ 1843년 8월 25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 씨의 딸로 1828년(순조 28) 안국방(현 서울 안국)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837년(헌종 3)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1843년(헌종 9)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다.
▷ 효정황후(孝定皇后) 이야기
효정황후 홍 씨(재세 : 1831년 음력 1월 22일 ~ 1904년 양력 1월 2일)는 본관이 남양인 익풍 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 씨의 딸로 1831년(순조 31) 함열현(현 전북 익산) 관사에서 태어났다. 1843년(헌종 9) 헌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년 뒤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었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대한제국 최초의 태후가 되었다. 1904년(광무 7) 양력 1월 2일에 경운궁(현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고, 1908년(융희 2)에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추존되었다.
숭릉 연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 둘레가 네모나고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 연못이다.
재실
평시에는 영(종 5품) 또는 참봉(종 9품)이 능역의 관리하기 위한 곳이다.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집무실(재실),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등이 있다. 단청은 하지 않는다.
역사문화관
붕어(왕의 승하), 시신처리 방법, 능자리 찾기, 봉분 공사, 채석, 돌 조각상 만들기, 건물 짓기 등 왕릉 조성 전반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건원릉의 혼유석을 5개의 고석이 바치고 있는데, 오랜 세월에 따라 깨어지고 오염되어서, 보존처리와 복원 교체과정을 볼 수 있다.
동구릉 외금천교
동구릉 입구에는 원래 신성한 왕릉의 공간과 속세 공간을 구별하는 물길인 금천이 흘렀다. 두 영역을 이어주는 돌다리인 금천교와 연못인 연지가 있었다. 즉, 외금천교와 외연지다. 동구릉 입구 43번 국도 확장과정에서 철거되었다. 해체된 채 동구릉 경내에 보관되어 온 일부 부재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홍예 모양을 복원하였다.
동구릉 석물 부재
입구 매표소
잔디 깎기 기계(맹활약 중)
동구릉 밖 풍경
<참고 자료>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https://royal.khs.go.kr/) 홈페이지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팸플릿(조선왕릉동부지구 관리소)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동구릉역사문화관
이상으로 서울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와 구리 동구릉(東九陵)을 탐방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